콘텐츠로 건너뛰기

블로그

명예의전당



글보기
전 여자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Level 3   조회수 257
2019-09-13 16:03:11

<송편지원금 : J님이 보낸 8원을 토스머니로 받았습니다> 


시작은 이 작은 알림이었다. 연락 안 한지 좀 된 친구 J가 보냈다는 토스의 송편지원금. 뭔가 싶어 토스 앱에 들어가봤더니, 내게 토스의 송편지원금을 보낸 건 J뿐만이 아니었다. 연락 안 됐던 친구, 길 가다 눈 마주쳐도 모를 학교 선배, 말이 심하게 안 통해 딱 한 번 보고 말았던 소개팅 상대, 한때 친했지만 싸우고 연락 안 한지 1년 정도 된 형, 심지어는 10분정도 고민을 해봐도 누군지 모르겠을 사람까지.


"송편지원금 10만 원을 지인들에게 보내고, 1,500원을 받으세요."


송편지원금은, 토스의 추석 기념 이벤트였다. 방법은 간단했다. 주위 사람들에게 보내라고 토스는 나에게 10만 원을 주고, 나는 전화번호부에 있는 지인들에게 송편지원금을 보낸다. 클릭 한 번으로 간편하게 돈은 보내지며, 보내는 금액은 랜덤이지만 보통 10원을 넘지 않는다. 타인에게 보내는 횟수에 따라 토스에서는 나에게 포인트를 부여하고, 그 포인트가 1,500점이 되면 나는 1,500원을 받을 수 있다.


한 마디로, '애니팡 하트 보내듯 주위 사람들에게 송편지원금을 뿌려라!'


스팸 문자를 끔찍히 싫어하고 애니팡 하트를 받으면 답례로 욕을 하는 나지만, 돈 앞에서는 장사 없었다. 클릭 몇 번만 하면 1,500원을 준다는데 이를 거부하는 건 거지의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에 열심히 송편지원금을 뿌리기 시작했다. "1원이라도 돈을 받으면 좋은 거잖아"라는 변명과 함께. 처음엔 연락을 자주 하는 주위 사람들에게, 그 다음엔 연락을 자주 안 하지만 그래도 연락하면 반겨줄 사람들에게, 결국엔 전화번호부 속의 모든 사람을 가나다순으로 정렬해 ㄱ부터 차례대로, 티켓팅을 1초 앞둔 극성 팬처럼 손가락을 움직여 송편지원금을 보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전 여자친구는 김 씨라는 아주 흔한 성과 김 씨만큼이나 흔한 여자 이름을 사용했다. 아마 여러분의 전화번호부 속에도 하나쯤은 존재할 그런 이름. 동명이인이 최소 세 명은 존재해 휴대폰에 저장할 때 괄호 치고 그 사람의 소속이나 특징, 별명 따위를 적어야 할 그런 이름. 그리고 나는 이상한 강박을 갖고 있었다. 전화번호부에 이름을 등록할 때 상대가 누구든지간에 본명 세 글자만을 적는 강박. 전면카메라가 없는 피쳐폰을 쓰던 시절, 음성인식으로 전화를 걸기 위해서는 전화번호부 속 이름을 특수문자나 띄어쓰기 없이 본명 세 글자로만 등록해야 했기에 생기게 된 강박. 시리와 빅스비의 시대에도 모든 이가 공평하게 세 글자로 등록된 전화번호부를 훑으며 만족감을 느끼는, 그런 괴상한 변태성을 간직하고 있는 게 나였다.


전 여자친구와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은 두 명 더 있었다. 같이 예술 작업을 했던 아는 동생 하나, 한 때 가까웠던 고등학교 선배 하나. 나는 분명히 전 여자친구의 번호를 휴대폰에서 지웠기에, 내 휴대폰에는 그 이름이 두 명밖에 없어야 했다. 실제로 내 카톡 친구 목록에는 두 명밖에 없었다. 하지만 내 휴대폰 전화번호부에 등록된 같은 이름은 세 개나 존재했다는 걸, 나는 정 씨들에게 송편지원금을 뿌릴 때쯤 인지했다. 3년만에 온 전 여자친구의 문자를 통해.


"뭐냐?"


뭐라고 답장할 수 있을까. "널 아직도 못 잊은 게 아니라, 단순히 1,500원 얻으려고 송편지원금 막 뿌렸는데 네 번호를 안 지운 줄 모르고 아무 생각없이 휴대폰을 만지다 실수로 보냈어"라고 믿지 않을 진실을 말해볼까. 3년만에 그리웠던 척 "오랜만이야, 잘 지내?"라고 보낼까. 적반하장을 컨셉으로 잡고 "넌 왜 이름이 그렇게 흔해서 날 헷갈리게 하고 난리야!" 역정을 내볼까. 뭐가 됐든 내 쪽팔림은 사라지지 않을 게 분명했지만 나는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답장을 안 하는 게 가장 적절한 대응이라는 결론을 도출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카톡이 아니라 '사라진 1'로 내가 읽었음을 그녀가 확인할 수는 없다는 점이었다.


카톡 친구 목록을 다시 확인해봤지만, 그녀의 카톡 프로필은 내 휴대폰에 뜨지 않았다. 대신 차단 목록에는 존재했었다. 차단 목록에 존재하는 그녀의 이름을 스크린샷으로 동봉해 "난 너를 100% 다 잊었는데 실수로 네 번호를 남겨뒀을 뿐이야"라는 걸 강하게 어필하는 문자를 보내려다가 참았다.


Ps. 내 전화번호부의 모든 사람들에게 송편지원금을 보냈지만 포인트는 1,400포인트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결국 문자메시지 함의 저장 안 된 번호들 -광고나 택배아저씨, 차 빼주세요 등- 을 모두 저장해 송편지원금을 보낸 뒤 1,500원을 받을 수 있었다.


댓글
자동등록방지
(자동등록방지 숫자를 입력해 주세요)
이전Forgiveness Level 32019-09-15
다음근황입니다 Level 22019-0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