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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일 단상
Level 4   조회수 469
2020-08-29 10:23:41

#1.

집안일을 하다보면 이것저것 떠오른다. 

방청소를 못한다고 뺨을 맞거나, 봉사활동 가서 설거지가 깔끔하지 못하다고 잔소리를 들은 기억

오빠야는 그냥 하면 되는 걸 왜 못한다고 말하냐고 소리치던 동생 목소리

작년 이맘때엔 아르바이트에서 다 잘리고 방청소도 제대로 안 되니까 어머니가 그냥 죽는 게 어떠냐고 하셨던 극단적인 사례까지...

사람의 신경은 참 다양해서 누구에게는 쉽고 누구에게는 어려운 일들이 일관성 없이 나열되어 있는데... 사실 가족이라곤 해도 그런 부분까지 이해를 기대할 순 없다.

이해도 능력이라 못하는 건 그냥 그들이 못하는 것이다. 못하는 것에 화를 내는 건 내 것이 아닌 장난감에 떼를 쓰는 어린이 같은 것이라 통제해 마땅하다.


물론 나도 하루에 23948번쯤 어린이가 된다.


#2

생각해보면 동생이 소리친 것이나 어머니가 뺨을 때렸던 것은 다 나로 하여금 집안일을 잘 하도록 하려는 의도에 기반하고 있다. 

그런 의도에, '당장' '지금보다 빨리' '더 뛰어나게' 했으면 하는 마음에 단축 코드 '화'가 반영되면

'더 잘 할 수 있는데 안 한다.' '못하는 게 아니라 안하는 것이다.' 같은 능력의 일반화나 의도의 일반화가 진행된다.

화는 생존과 연관되었을 때 더 쉬이 진행된다. 

아마 죽는 게 어떠냐는 말씀은 내가 내 능력으로 도저히 생존할 수 없을 것 같으니 화 코드까지 진행했는데 그래도 답이 없어 보이니까 나온 비명 같은 것이 아니었을지.


#3

남의 화는 사실 내가 어쩔 수 없는 해일 같은 것이라 이러니 저러니 말해봐야 별 소용이 없다. 다만 내 자신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조절을 해야 한다. 일단 나는 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페니드를 먹고 지금 꼭 한다! 는 느낌으로 하루에 설거지만 했다. 여기에선 강박이 중요했다. 밥 먹고 무조건 바로. 양에 관계없이, 모일 때까지 기다리는 경우는 한 번도 없게 무조건 바로 했다.

부모님이나 동생이 건드리지 못하게, 때로는 어머니가 해 버리셨는데 나는 너무 화가 나서 소리치고 말았었다... 열심히 의자를 조립하는데 옆에서 못을 빼는 것과 같은 행위기 때문이다.

다소 강박적인 습관들이었기 때문에 불안과 화가 늘 나와 함께했다.


#4

밥 먹고 > 약 먹고 > 바로 설거지의 루틴에서 종종 약 먹을 것을 까먹고 나도 모르게 밥 먹고 > 설거지하다가 > 앗 약 안먹었다! 의 실수가 발생할 때쯤 다른 일을 추가했다.(한 달 정도 걸린 듯)

그것은 빨래 널기다. 부엌과 빨래방이 이어져 있기 때문에 쉬우리라 생각했지만 자꾸 설거지까지 하고 침대에 드러눕는 나를 발견하고 말았다...

그래서 밥 먹고 > 설거지하다가 > 앗 약 안먹었다(드러누움) > 약 먹고 설거지 에서 시작했다... 아니 고작 설거지하고 빨래한다고 마음보기 명상에 계획까지 필요한 나 실화냐...?

정말 바로 안 되면 약을 하나 더 먹었다. 설거지하고 빨래만 했는데 도파민이 다 없어져서 어항 앞에 가서 하루종일 물고기를 보았다... 

그러다 보니 밥 먹고 > 설거지하다가 > 약 먹고 > 빨래하고 > 어항 물 갈아주기 루틴이 되었는데 어항은 취미라서 꽤 관리하기가 쉬웠다.

그래서 밥 먹고 > 설거지하다가 > 빨래하고 > 어항 물 갈아주고 나서 > 물고기 용품 사러 수족관에 나가는 김에 분리수거와 음식쓰레기 관리를 시작했다.

약은 필요한 날도 있었고 필요하지 않은 날도 있었다... 다 달성하고 나면 꼭 에이앱 방에 이상한 걸로 자랑을 했다...

집안일 강박 자랑... 사실 물고기가 하드캐리한 느낌도 든다. 수족관 아저씨를 봐야 하기 때문에 내 몸에 냄새가 나는 게 신경쓰여서... 샤워도 했다.


#5

사실 가족의 부정적 피드백을 생각하면 오히려 오기가 생겨서 하기 싫어지는 마음도 생기는데... 그것 역시 화의 작용이다... 

가족을 단순화해서 나쁜 부분을 본질적으로 혹은 내재적으로 생각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긍정적인 피드백을 주고..? 에이앱에서 집안일로 자랑질 하고..? 그래야 했다... 긍정적 피드백의 감각이 부정적 피드백의 기억을 압도하도록.

이렇게 보면 습관 만들기에서 인간 뇌는 납땜질이 필요한 기계회로랑 닮은 면이 있다. 어느 쪽이건 기술로서의 art가 필요하다.

근데 극복하기 어려울 정도의 극단적인 부정적 피드백을 장기적으로 받아온 사람들에게는 일이 이렇게 쉽지가 않을 것이다.


#6

요즘은 면접학원을 다니는데도 빨래랑 분리수거는 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은 학원도 스터디도 공교롭게 아무것도 없는 날... 예전처럼 여유롭게 집안일을 하다가 문득 집안일을 '여유롭게' 해내는 점에서 산뜻하게 놀라버려서 쓰는 글입니다.


#7

부작용으로 내가 집안일을 너무 하니까 아버지가(손 다치셔서 손에 습기 묻으면 안 되심) 설거지가 남아있거나 빨래가 남아 있으면 자꾸 어머니를 닦달하시게 되었는데...

나는 부모님 중 어머니로부터 adhd를 받은 사람이고, 때문에 어머니가 그런 걸 처리하는 데에 얼마나 많은 수고가 들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제발 그러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파민적으로 할 수 있는 부분과 하기 어려운 부분, 할 수 없는 부분이 나뉘기 때문에, 나는 집안일을 포함해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고, 못하는 사람에게 하라고 닦달할수록 그 사람의 실행능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아버지 요즘 갱년기셔서 화 조절 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으심 ^ㅗ^ 그래서 닦달하면 악화할 게 분명했다.

여기서 다시금 아버지의 분노에 대한 내 분노의 정당성이 탈락한다... 스토아의 가르침에 따라 인과관계를 고려해서 문제를 해결해야지 화가 문제를 단순화하게 냅둬서는 안 됨...

그래서 아버지가 드시는 약의 부작용 중에 분노조절 문제가 있길래 그걸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화를 막 으아악하고 참기 시작하셔서 지적질의 빈도가 1/3정도로 줄어들었다.

화를 다스리는 첫 단계는 내가 화를 내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인데 인지능력이 떨어지는 시기에는 그걸 자각하기가 어렵고, 일반화 징후로 화를 자각하는 스킬도 수행이 필요한 과정이라 하란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래서 나는 나를 위해서 집안일을 하되 나머지 집안의 대소사를 그냥... 생태계 바라보듯이 하는 중...

그러다가 지난주에 동생에게 집안일 도깨비냐는 소리를 들었다.


아직까진 습관에 강박이 필요하기 때문에 집안 구성원들이 설거지를 하려고 하면 화를 참을 수가 없다... 건전한 습관은 어떻게 만드는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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