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선생님은 결과를 모니터에 띄워가며 조심스레 설명해주셨다. 나의 뇌는 지금 '잠들어 있는 상태'라고 하셨다.
항상 그 반대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뇌는 깼는데 체력이 받쳐주지 않아서 몸이 피곤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눈뜨기 어렵고 시야가 흐릿해지는 건 모니터와 자료를 많이 본 탓이라고 생각했다. 내 스스로도 움직이는 게 마치 좀비같다 생각했었다. 그런데 정말 뇌는 잠들고 몸만 움직이는 좀비였다.
뇌는 자고 일어나면 신체와 함께 자연스레 깨는 것이 아니었던가?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상식은 모두 거꾸로 뒤집히는 것 같았다. 복용에 대한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담당의 선생님께서는 하루 빨리 약물치료가 시작되면 좋겠다고 하셨다.
그렇구나, 나 진짜 심각한 상태구나. 몸 속에서 심장이 두어 번 쿵쿵- 하고 떨어져 내렸다.
선생님은 콘서타라는 약물에 대해서, 그리고 앞으로 진행될 치료계획에 대해 말씀해주셨다. 여러가지 약이 있지만 나의 현재 생활패턴에 이 약이 도움이 될 것이라 하셨다. 약의 긍정적인 부분, 부작용적인 부분 모두 상세히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이전에 우울을 느낄 때는 정신의학과는 생각만해도 방문도 두렵고, 정신과 처방약을 먹는 것은 그 자체로 거부감이 들었다. 그래서 상담센터를 찾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 날 나는 의사 선생님의 처방에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이고 있었다.
이제는 오히려 약이 있다는 사실이 다행으로 느껴졌다. 약을 먹어서 도움을 받을 수 있구나. 그러한 약이 다행히 개발되어 있구나. 하는 마음이었다. 완치의 개념은 아니라고 하셨다. 그러나 우울, 불안약물과는 달리, 뇌에 선천적으로 부족한 물질들이 있는데 이것의 보완을 도울 것이라 하셨다.
콘서타 18mg. 나와 처음으로 만난 ADHD약이었다. 아주 작고 타원형으로 동글동글한, 따듯한 색감의 레몬색 약이었다. 그렇게나 두려워 하던 정신의학과의 약인데, 색감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두려움과 거부감은 어느샌가 잦아들었다.
약봉투에는 다행히 아무 정보도 써있지 않았다. 병원 이름도, 나의 진단명도. CAT검사 결과지와 약을 받아들고 지하철을 타고 한강을 건너왔다. 한강을 건널 때 잠깐 지하철이 지상으로 올라오는데, 더운 여름의 저녁 7시 30분은 낮이 길 때였다.
노을이 지고 달이 뜨기 전의 하늘의 색깔이라 온감과 냉감 사이의 그라데이션이 보였다. 주황색과 보랏빛이 섞인 하늘의 중간 영역을 보며 지금의 나를 나타내는 색깔이라고 생각했다.
복용 첫 날, 레몬색 콘서타 18mg 1알과 같이 들어있는 작고 하얀 알약을 먹었다. 두근 거림 반, 염려 반이었다. 나에게 이 약이 효과가 있을까? 아니라면 어떡하지?
하지만 하얀 알약이 문제였다. 콘서타의 대표적 부작용 중 하나인 심장 두근거림을 보완시킬용이었는데 인데놀인줄 모르고 먹었다. 인데놀 10mg. 적은 용량임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큰 부작용을 주었던 약이다. 면접의 긴장감이 심해 스터디원에게 추천을 받아 동내 내과에서 받았던 인데놀 10mg. 면접 전날 테스트 겸 한 알 먹었다가 2시간 동안 시야도 붕 뜨고, 열몸살 걸린 사람처럼 몸이 더웠다. 시선 잡기가 어렵고 외운 내용도 헛소리를 했다. 스터디원들이 오늘 갑자기 왜 이러냐고 물었을 정도다.
콘서타 때문인 줄 알고 헤롱거리는 시야를 붙잡고 병원에 연락을 해서 봉투에 든 약들을 물어보니 그중 하얀 것이 인데놀이라고 하셨다. 현재와 과거의 증상을 말씀드리니 익일부터 당장 복용을 중단하고 콘서타만 먹으라고 하셨다. 1일 차는 그렇게 복용 후 첫 느낌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채 지나갔다.
다음날 아침, 다행히 콘서타만 먹었을 때는 심장 두근거림과 같은 증상이 안 느껴졌다. 다른 분들의 후기처럼 뇌가 당겨진다라는 느낌은 없었지만 시야의 화질이 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유튜브 동영상으로 비유하자면 720p였던 시야가 1080p로 보이는 것 같았다. 하룻새 시력이 오른것은 아닐텐데 뇌가 깨어나니 무언가를 더 선명하게 받아들일 수 있나보다 생각했다.
그리고 책상 위에 책이 눈에 들어왔다. 책을 보다 어렵게 느껴지면 회피했던 단원들이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일단 읽어보자라는 마음이 들었다. 어려우면 또 다시 읽지 뭐! 회독수를 늘려보자.
이전에는 왜 이렇게 생각하지 못 했을까? 난 복잡하고 어려워서 못 읽겠어, 싫어. 어차피 이해 못 할것 같아. 흥미있는 부분만 골라 읽을래. 나의 지난날의 생각패턴들이 다시 떠올랐다.
몇 달을 안 읽고 지지부진 미뤘던 단원이 몇 시간만에 읽혔다. 스스로도 놀랐다. 이해가 안가도 일단은 읽으려고 하는 나의 자세에 스스로도 놀라웠다. 대견하지만 아직은 낯설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그제서야 어지럽혀진 방이 보였다. 아침에 일어난 후 그대로인 이불. 가뜩이나 긴 머리카락이 여러가닥 떨어져 있는 방바닥. 한 달전에 닦았던 거울. 먼지가 내려앉은 책장칸.
팔을 걷어부치고 머리를 묶어 올리고 방청소를 시작했다. 엄마가 놀라서 물어보셨다. "네가 웬일이냐? 주말 아침부터 청소를 먼저 하고? 어제 뭐 꿈이라도 꿨어?" 그냥 빙그레 웃고 마저 청소를 했다. 여름날 아침, 열어 젖힌 창문을 타고 선선한 바람이 들어왔다.
꿈? 꾸었지. 밤새 단꿈을 꾸었어. 내가 좋아져서 열심히 살고 있는 꿈이었어.
그렇게 일주일이 지난 후 다시 병원을 방문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