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로 건너뛰기

블로그

명예의전당



글보기
저는 도넛 같은 사람입니다.
Level 3   조회수 184
2025-04-08 14:36:29


저는 도넛 같은 사람입니다


10년 전, 20대였던 나는 병원 실비 청구를 할 줄 몰랐습니다.

아주 간단한 절차인데도 몰라서 3년을 미루었고, 

그 사이 엄마에게 잔소리를 참 많이 들었죠.


불과 2년 전만 해도, ADHD로 생긴 화상 때문에 병원에 다녀왔지만

진료비 영수증을 받으러 다시 병원을 찾은 건 무려 1년 뒤였습니다.

그만큼 제 생활은 정리되지 않았어요.


많은 눈물을 흘렸고, ADHD로 인한 ‘tax’도 정말 많이 치렀습니다.


저는 늘 넘어지곤 했어요.

그래서 중학생 시절 제 별명은 ‘꽈당이’, ‘우당탕탕”이었습니다.

대학교 때는 시간 개념이 없어서 동아리에서 늘 지각했고, 불명예 기수가 될 뻔했죠.

20대 초반엔 핸드폰을 밥 먹듯 잃어버려 친구들이 신기하게 볼 정도였고,

20대 후반에 공부를 시작하면서도 시간 관리를 못해 마지막 문제를 급하게 써내야 했고,

결국 수험 기간은 1년이 더 길어졌습니다.


그리고 30대가 되어서야,

저는 제가 ADHD와 HSP(감각예민성)를 함께 가진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단지 제가 책임감이 부족한 사람인 줄 알았거든요.


그동안 수많은 밤, 저는 저 자신을 다독였습니다.

“정말 수고했어. 정상처럼 보이려고 정말 많이 애썼구나.”


그러다 깨달았어요.

저는 ‘도넛 같은 사람’이라는 걸요.

안이 텅 빈 동그란 도넛.

그 텅 빈 부분을 숨기고 싶어서, 완벽해 보이려 애쓰며

사랑하는 것들을 마음 아프게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제가 도넛이라는 걸 알아서 괜찮습니다.

도넛은 안이 비어 있어도 맛있잖아요?


지각을 일삼던 저는,

이제 갤럭시 워치에 알람을 20개씩 맞춰 시간을 관리합니다.


실비 청구를 몰랐던 저는,

병원 가는 날마다 진료비 영수증과 처방전을 봉투에 담아 챙깁니다.


잔고를 바닥내던 저는,

이제 계좌를 여러 개로 나눠 자동이체로 용돈을 관리합니다.


청소를 못하던 제 방은,

이제 서랍까지 깔끔하게 정리되어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습니다.


우울과 불안으로 가득했던 저는,

이제 기쁨과 감사로 하루하루를 채웁니다.


항상 누군가의 챙김을 받던 저는,

이제 누군가를 돌보고 챙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누군가가 저를 위해 기도하던 그 시절을 지나,

이제는 제가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합니다.


오늘 점심, 병원 데스크 직원분이

영수증 하나하나 챙기는 저를 보며 말했습니다.

“와, 철저하시네요.”


그 한마디가 제 지난 노력들을 다 보상해 주는 듯했어요.

왜냐면 저는 늘 어설프고 서툰 사람이었지, ‘철저한 사람’은 아니었으니까요.


물론 저는 여전히 ADHD가 있어서

시간 관리가 어렵고, 충동적으로 지출을 하기도 하고,

물건을 자주 놓고 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불안하지 않아요.

저는 원래 도넛 같은 사람이란 걸 알게 되었으니까요.


댓글
자동등록방지
(자동등록방지 숫자를 입력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