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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서타 3주 차(부제: 사람은 그리 쉽게 변하지 않는다)
Level 2   조회수 596
2019-12-02 13:16:56

하루의 흐름:


아침에 일어난다. 대충 8시 전후. 

@진단받기 전 지독한 불면증에 시달렸지만 솔직히 스스로 원인은 알고 있었다. 생각이 너무 많음. 그리고 그 정신에너지를 낮에 소진하지 못함. 그리고 이어지는 수면부족과 늦잠, 남아도는 에너지... 일할 때는 이런 적이 없었다. 심지어 전업으로 공부할 때도 이러진 않았는데... '규율이 곧 자유다' 라는 말을 세삼 되뇌인다.



9시에 약을 먹고 하루를 시작한다. 그냥 왠진 모르겠지만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의욕은 약발일까, 플라시보일까?

아침을 먹는다. 요즘은 껍질째 먹는 사과에 빠졌다. 씹는 느낌도 좋고 포만감도 준다. 약을 올리니 집중은 되지만 머리가 안 돌아간다는 것을 깨닫고 연료를 넣어주기로 한 것이다.


도서관에 가서 책상에 앉는다. 잠시 긴장한다. 숨을 들이쉬고 타이머를 켠다. 시작. 요즘은 한 번에 40분씩 한다. 잡생각이 뭐 나긴 하지만 지장은 없다. 0mg가 말 안 듣는 애, 18mg가 강아지 산책시키는 거라면 27mg은 마음이 맞는 친구같다. 나에게 잡생각을 '제안'하지만 절대 강요하지 않는다. 한 세션이 끝나면 어떻게든 바람을 쐰다. 27mg로 올리고 나서 입이 좀 마르는 기분인데 그만큼 물을 자주 마시고 바람을 쐰다.


점심을 먹는다. 체중감량 중이었는데 마침 식욕이 떨어졌다. 치킨샐러드로 가볼까. 점심을 고르는 것도 고민이다. 당분간은 고정메뉴로 하니 편하다. 그리고 1시간 동안 쉰다. 책을 읽기도 하고, 음악을 듣거나 인터넷을 하기도 하고 가끔 꽂히면 이렇게 막 글도 써본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것도 있겠지만 사실 그냥 막 말하고 싶은 욕구의 표출 아닐까.


오후도 오전처럼 간다. 변수는 투약 8시간 경과 후. 약효가 떨어지는 것도 있겠지만 체력의 소진도 있을 것이다. 슬슬 간단하게 저녁을 먹는다. 그리고 그 후는 가벼운 과목으로 간다.


오후 7시쯤 되면 원래의 나로 돌아오기 시작한다. 공부할 때 머리를 만지작거리는 습관으로 머리는 이미 떡이 져 있다. 댐이 무너진 것처럼 집중을 할 수가 없다. 이럴 때는 그래도 영상이 낫다. 기왕이면 재밌는 걸로. 1타고 뭐고 필요 없다. 들어서 재밌는 강사가 나만의 1타이다.


감정이 터질 것 같다. 이때 쯤 운동을 하러 간다. 가기 싫지만 관장님과의 약속과 나 스스로와의 약속이 있기 때문에 간다. 옷을 입는 순간까지도 솔직히 하기 싫다. 시작하면 숨이 찬다. 선배들은 나에게 기대가 많은 것 같다. 정말 싫다 솔직히. 하지만 내 감정을 알고 있기에 무시한다. 


숨이 차서 움직이기도 힘들 만큼 몰아부치면 너무 괴롭지만 그 후의 보상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기꺼이 밀어부친다. 완전히 소진하고 잠시 앉아있으면 뒤늦게 보상이 온다. 이 맛이지. 문제는 부상이라도 입어서 에너지를 소진하지 못한 때이다. 기분이 더럽다. 옆에서 뭔가 좋은 소리를 해줘도 너무 듣기 싫고 막 폭발할 것만 같다. 감정에서 어떻게든 벗어나서 체육관을 떠난다. 유체이탈은 내 전문이다.


나의 일희일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성격은 조울증이 아닐까 의심될 정도였고(물론 아니지 싶은데..) 언제나 초연한 사람이 되려고 무던히 노력해왔는데, 이제 보니 나에게는 모든 감정이 일반적인 사람들보다 크게 다가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작은 성취에 과도하게 흥분하고, 슬픔에 압도되고, 사소한 무례함에 대응하지 못하고 온 몸을 떨었던 것이 이해가 됐다.


힘이 남아돌아 감정적으로 괴로운 날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다른 생각에 사로잡히기 전에 운동을 한다. 대체로 근력운동이 좋고, 기왕이면 컨디셔닝(높은 심박수의 무산소성 운동)이 최고다. 케틀벨 두 개로 하는데, 정말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다는 생각에 다른 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다. 


씻고 나서 하고 싶은 걸 하게 놔둔다. 그래도 자기 약 30분 전이면 머리쓰는 걸 멈추고 잠깐 앉아있는다. 내일 할 걸 간단히 준비하고 잠자리에 든다. Sleep Cycle이라는 앱을 사용해서 잠을 기록한다. 약 부작용 중 하나가 불면증이라고 하는데 다행히도 잘 비껴가고 있다. 게다가 제법 괜찮은 기록을 계속해서 찍다보니 오늘도 잘 자고 싶다. 그리고 잠들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누우면 어느새 잠에 든다.



휴약일:

오늘 저녁에는 입사 동기를 만나기로 했다. 부산까지 가야 된다. 다음날은 아침에 일본에 간다. 과거 일했던 동료가 결혼을 한다고 고맙게도 초대를 해 주었다. 다음날 한국에서 시험이 있었기 때문에 고민하다 당일치기로 가기로 했다. 이것도 충동성의 발현이었을까...


전날 거의 모든 것을 미리 준비해 놓았다. 남은 건 짐을 '싸기만' 하면 되는데 오전 내내 일이 굴러가지 않는다. 그걸 감안해서 모든 일정을 뺐지만 좀 신기하다. 이렇게 사람이 변할 수가 있는가. 이게 사람 새낀가(ㅋㅋㅋ). 선물을 담을 마땅한 봉투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용기를 내서 집 밖으로 나간다. 봉투를 고르느라 또 한시간이 지나고 고민을 거듭하다 단순한 디자인에 충분한 크기의 놈으로 고른다.

생각해보니 아직도 환전을 안 했네. 앱으로 신청을 해서 수령을 위해 은행으로 가는데 아뿔싸, 오늘 안 열었으면 어쩌지? 어? 열었네?! 아, 금요일이었네!


축의금 단위도 다르고 봉투도 액수 별로 골라야 하고 그걸 정해진 순서에 맞게 포장하고 그걸 또 정해진 천에 싸서 전달해야 한다. 일본문화의 좋은 점도 분명 있지만 내가 일본생활을 싫다고 생각했던 이유가 이거였던 것 같다. 매뉴얼의 나라. 어쨌거나 외인이니까 봐주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구색만 맞춰본다. 희한한 건 그들의 나라에 가면 나도 그들처럼 생각하려고 노력하고 안달하게 된다. 쨋든 내 지인들한텐 피해 주기 싫어서...


무사히 부산 친구와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 일을 그만둔 이야기 등을 한다. 한편으론 아쉽지만 어차피 정년 채우고 그만두는 거랑 시기만 다를 뿐이다. 오랜만에 맥주를 두어 잔 마시고 잠을 청한다. 다음 날 무사히 비행기를 타고, 오후의 일정에 대비한다. 옷을 차려입고 다시금 긴장에 빠진다. 이날은 일단 아침에 약을 먹었다. 다른 동료들 뒤에 묻어가기로 한다. 시간이 빠듯하겠지만 일단 피로연에 집중하기로 한다. 슬슬 자리를 잡는 것에 대해 고민하던 놈이어서 잘 됐구나 싶었다. 끝나고 인사하고 일행에게 양해를 구하고 도망치듯이 나온다.


걱정은 했지만 어쨌거나 미리 짜놓은 시간 안에서 모든 것을 맞출 수 있었고, 환전도 빠듯해서 점심은 270엔 정식(밥 된장국 단무지 시금치절임 두부 끝..)으로 때웠고, 돌아오는 비행기는 전력질주해서 겨우 잡았다. 그게 막편이라 어쩔 수 없었지만 그정도는 계산했으니 뭐...ㅋㅋ 

담날 시험은 오후였고 일본어시험이니 딱히 준비 안해도 별 문제는 없다. 계획대로야...ㅋ (어째서 난 아슬아슬한 계획에 집착하는가?)



느낀 점:

@를 인지하고 약물의 도움을 받으면서 약간의 차이나 인식의 변화는 있지만 사실 난 이전의 나랑 완전 다른 사람이라 보긴 그렇다. 요즘도 공상을 즐기고, 할 게 없으면 귀에 음악을 꽂고 산다. 기분나빴던 일이 있으면 그걸 논박하는 시나리오를 머리속으로 쓰고 연기하고 있다. 그저, 약을 먹었을 때의 나를 모델로 삼아서 그 동안 당연하다 느꼈던 것에 의문을 제기하고, 더 적극적으로 약 없이 사는 법에 대해 고민하는 점이 차이인 것 같다. 이 약효도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기에.


여튼. 사람은 그리 쉽게 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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