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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지나치게 다정하게 느껴지시는 분들께
Level 3   조회수 139
2023-04-01 15:40:10

어디에서도 하지 않았던 이야기가 있다


나는 내 우울이 합리적이라고 믿었다

우울, 그러니까 정확히는 '죽고 싶다',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나을 것이다', '나는 죽음으로써만 기어이 편해질 것이다' 라는 감정은

내가 나 자신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나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느끼는 감정이라고 믿었다


흔히 우울한 사람들은 스스로를 이유 없이 미워하고 싫어한다고들 했다

하지만 난 '우울'하면서도 이상하게 그렇지 않았다

그냥 이 세상이 내게 불친절하고 무성의한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그렇다고 해서 내가 불특정 타인에게 다정하고 섬세하려 노력하기를 포기할 이유는 못 된다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나는 세상에서 살아가야 했지만 세상이 나를 대하는 것보다도 상냥하게 세상의 구성원들을 대하고 싶었다

그렇다면 살아가는 것이 고되고 힘들 수밖에 없지 않는가

내가 만약 스스로 죽는다면 그건 내가 나를 너무 사랑해서, 다정한 나를 포기하기가 싫어서, 오히려 나를 지키기 위해 세상으로부터 나를 떨어뜨려놓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나는 세상에 섞이는 대신 내가 더 무심해지고 무뎌지지 않도록 지킨다,

이런 방식으로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통상의 '우울'과 다른 것 같았다

스스로를 좋아하면서도 우울한 사람들의 얘기를 많이 들어보지 못했다

이 괴리가 뭘까 생각하면서도, '죽고 싶다'는 얘기, 그리고 '나는 나를 좋아한다'는 얘기는 각각 다른 이유로 누군가에게 쉽게 털어놓기 어려운 주제들이어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요즘 나는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ADHD 진단을 받고 약을 먹으면서 어쩌면

내가 나를 좋아하면서도, 여전히 다정하려고 노력하면서도 덜 지치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고 믿게 됐다

그리고 내가 제대로 된 진단을 받고 약을 처방받기까지, '내'가 아닌 타인이면서도, 내게 한없이 포용적이고 너그럽고 다정하게 대해 준 이들이 있음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그들도 '세상'의 일부인데 나는 나와 떨어져 있는 사회적 이슈들까지도 확대경으로 들여다보면서 티끌을 찾고 내 기력을 깎아먹고 추상적인 '세상'을 미워하는 데 골몰했다

어쩌면 나 역시 세상인데도


우울에 빠져 있을 때는 이런 감정을 기록하지 못했다

물 속에 사는 물고기가 물에 대해 묘사할 필요가 있겠는가? 알아채기도 어렵거니와 그걸 서술하거나 묘사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도 없는걸

하지만 놀랍게도 뇌신경물질을 조절한다는 ADHD 약물은 내가 그 물 밖에서도 숨쉴 수 있는 존재임을 상기시켰다


우울이 합리적으로 느껴진 것은

당시 내가 가진 신체적이고 뇌신경학적인 조건 아래에서

실제로 최소한의 에너지를 쓰는 게 가장 '합리적'이어서였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 상태에서 벗어나도록 도움을 줄 수 있는 물질들이 어쩌면 세상에 있다


우울이 익숙하고 자신이 죽는 게 왜 자신에게만은 가장 상냥한 길인지 설명할 수 있는 사람도,

어쩌면 조금 다른 조건들에 접근성을 갖게 된다면, 똑같이 합리적인 계산을 통해서 삶을 더 연장할 수 있다

아직 조금만 더 살아 보기를

어느 순간 어떤 조건들이 나를 물 속에서 건져올려줄지도 모를 일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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