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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HD 진단 이후 달라진 삶을 위한 회고록
Level 1   조회수 250
2021-10-29 20:07:47

ADHD 진단 이후 달라진 삶을 위한 회고록  (긴~~~~글입니다. 읽다 혈압 오르실 수도 있어요 ㅜㅜ)




나는 항상 불안과 함께 해 왔다. 초등학생때 아토피로 놀림을 받았었다. 그 당시 아토피는 흔한 질병이 아니었고 나는 무척 심한 축에 속했다. 외형적으로 놀림을 받는건 애들이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배울만큼 배운 초등학교 담임이 아이들이 다 듣고 있는 교실에서 나를 '야 아토피!' 하고 부르던 그 순간은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중학교 시절 남자애들한테 아토피로 괴롭힘을 당했던건 아직도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참 의젓한 척을 했다. 엄마가 나는 아직도 사춘기가 없던 아이로 기억을 한다. 아니다. 장담하건데 나는 매일같이 울었다. 힘들었지만 내 아토피로 마음 아파하는 우리 엄마를 더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내색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누구는 이런 시간들을 거치며 성숙해졌을 테지만 나는 무척 미성숙하고 불완전한 사람으로 자랐다.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어릴 적 날 괴롭히던 아토피는 스테로이드의 힘을 빌려 심해질 때마다 재워버렸다. 어릴때 못꾸미던 한을 고등학교 가서 다 풀었다. 그렇게 1,2학년을 날 가꾸는 재미에, 놀러다니는 재미에 살았다. 남들 열심히 공부하는 고3시절 나는 또 열심히 놀았다. 제2외국어로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좋은 성적은 아니지만 그나마 나은 과목들로 수시를 붙으리란 막연한 자신감이 있었고 결과적으로는 붙었다. 비록 원하는 과는 아니었지만 지금 돌이켜보니 원하는 과에 갔다 한 들 성취를 내지는 못했을 것 같다.


 대학에 붙었다. 수도권 소재의 전문대 산업디자인과. 부모님의 등살에 밀려 지원한 곳이 그나마 제일 나은 대학이었다. 그림은 유치원생 수준에 디자인 감각이라곤 하나도 없는 나와 거리가 먼 곳이었지만 초반엔 나름 열심히 해보겠다고 노력했다. 그러나 나는 좋아하지 않는 부분에선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는 인간이었다. 자유가 주어지자 나는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되었다. 20대 초반 시절 나의 만행들 시작.


1. 실습이 마음 먹은 대로 되지 않았다. 남들은 다 따라하는데. 나는 하라는 대로 해도 왜 키보드 모양은 안나오고 벽돌이 나오는가. 친구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도와준다고 하자 거절했다. 학기 중간에 드랍했다. 한가지 과목은 최하점, 다른 한 과목은 낙제점을 받았다.


2. 패키지 디자인 과목이 있었다. 시중에 파는 화장품들 처럼 패키지를 디자인 하고 결과물로 한 학기의 학점을 평가받는 과목이었다. 나는 화장품 사이즈를 재고, 맞는 틀을 일러스트로 제작해야 한다는게 너무 어렵고 싫었다. 2번인가 수업을 듣고 드랍했다. 낙제점을 받았다.


3. 교양시간은 탁구였다. 초반엔 재미있었다. 점점 흥미를 잃어 낮술을 먹고 수업에 들어가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C를 받았다.


4. 동아리에 들어갔다. 부원들과 매일 같이 저녁마다 술을 먹기 시작했다. 동아리 모임 일정이 없을 때에도 부원들과 만나 곳곳을 쏘다니며 술을 먹었다. 내 일주일 중 5일은 술과 함께였다. 이때부터 내 대학생활이 본격적으로 망가졌다.


5. 어쩌다 보니 수업도 제대로 듣지 않던 내가 산업디자인과의 집행부에 들어갔다. 몇 번 엠티를 다니다 집행부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다. 선배들, 졸업한 선배들까지 있는 자리였는데 그냥! 일이 너무 많으니 귀찮아서! 나가기 싫다고! 안나갔다.


6. 어쩌다 보니 수업도 제대로 듣지 않던 내가 과를 대표해서 디자인 대회 팀에 들어가게 되었다. 남들 밤까지 모여서 개고생하며 작업할때 지각했다. 참석도 여러번 빼먹었다. 그럼에도 착한 우리 조원들은 날 제외시키지 않았다.


7. 디자인 대회 날, 지각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분명 시간맞춰 준비한다고 했는데 지각했다. 부스가 다 차려지고 교수님들이 본격적으로 심사하기 직전 도착했다. 그땐 몰랐다. 내가 조별과제 쓰레기 빌런이었다는 것을. 정말 너무 미안하다.


8.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니 너무 우울했다. 모든 수업을 자체휴강하고 푹 쉬자 자괴감이 들었다. 이후엔 자괴감이고 뭐고 매일같이 자체휴강치고 술이나 먹으러 다녔다. 그것도 대학교 근처 술집으로. 집에서 놀다 친구들 수업 마치고 나올 때 대학교에 도착했다. 그당시의 나는 친구들과 같은 과 대학생이었으며 휴학생도 아니었다. 


9. 내 착한 친구들은 나를 걱정했다. 난 그때라도 정신을 차렸어야 했다. 매일 자체휴강으로 수업을 빠지다 보니 집에서 쉬면서도 나는 행복하지 못했다.

조그맣게 생겨났던 우울은 커져 나를 잡아먹었고 더 나은 해결 방안이 도처에 있었음에도 길을 찾지 못했다. 이해가 가지는 않지만 그땐 내가 키워놓은 좌절감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것 같다. 당장 학교를 나간다 해도 너무 많이 쉬어버린 탓에 진도를 따라잡을 엄두가 나질 않았고, 출석도 말아먹어서 학점을 기대하긴 힘들었다. 엄마가 도저히 너랑 같이 못살겠다고 할 정도로 매일 술을 먹었다. 동아리 사람들이랑, 과 친구들이랑, 고등학교 친구들이랑, 어쩌다 보니 친구 타고 알게 된 친구들이랑. 그리고 취하면 울었다. 취한 나는 누가봐도 진상이었다. 친구들이랑 술을 마시면서라도 불안을 해소해야겠는데 술이 들어가면 내가 그렇게 한심할 수가 없었다.


10. 그 이후에도 난 좋은 말로 하면 방황을 계속 했고, 내가 느낀 바로 말하자면 주제도 모르고 꼴값을 계속 떨었다. 엄마는 급기야 내 머리카락을 잘라버려 못나가게 하겠다고 새벽에 들어온 나의 머리채를 잡았다. 막겠다고 손을 들어 방어하다 가위에 손이 찔려 피가 철철 났다. 엄마는 진정하지 못했고 난 무서워서 화장실에 숨었다. 엄마가 망치로 화장실 문을 부숴버렸다. 이사오기 전 우리집 화장실 문엔 커다란 스티커가 앞 뒤로 붙어있었는데, 앞면은 망치로 부서진 문을 가리기 위함이었고 뒷면은 피로 찍혀있는 내 손바닥 자국을 가리기 위함이었다.


11. 올 것이 왔다. 학사경고장. 집 우편으로 배송된 그것이 재앙의 씨앗쯤 되었던 것 같다. 추가적으로 그 무렵 쯤 CC였던 남자친구와도 헤어졌다. 의지 할 곳마저 사라지자 나는 핸들이 없는 8t 트럭이었다. 하루 하루 미칠 것 같았던 나는 급기야 술을 쳐먹고 8차선 도로에 죽겠다고 뛰어들었으며 모르는 사람들이 기분나쁘게 쳐다본다고 죄 없는 내 일행들 끌어들여 패싸움도 하고 취해서 택시비 없이 택시를 탔다 경찰서에 연행되었다. 날 데리러 경찰서에 온 부모님이 보는 앞에서 난 죽는게 낫다며 손목을 물어 뜯었다. (이 창피한 흉터는 아직도 없어지질 않는다...) 정신을 차려보니 엄마가 날 안고 자고 있었다. 아주 어렸을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12. 우리 가족은 나름 괜찮았다. 문제가 없진 않았지만 그래도 나름대로의 일상들을 유지하며 웃고 살았다. 그게 나로 인해 깨졌다. 어떻게 해서라든 내가 박살내버린 일상을 다시 복구시키고 싶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졸업장을 따야 한다는 엄마의 말에 대학은 한 학기 더 다녀 모자란 학점을 꽉꽉 채워 졸업하기로 했다. 학점이 부족해 전과가 불가능하자 간호조무사 학원을 야간으로 등록했다. 학교, 학원을 병행하면서 다시 열심히 살아보기로 했다. 


13. 학교 시험을 봐야 하는 날이 간호조무사 실습기간이랑 겹쳤다. 매일 출근을 하며 실습을 해야 해서 시험을 볼 수가 없었다. 교수님께 양해를 구했지만 불가능하다고 했다. 무엇이 중요한지도 모르고 화가 난 나는 그대로 시험을 드랍했다. 그 과목 낙제로 인해 졸업학점을 채우지 못해 한 학기를 더 다니게 됐다.


14. 생각보다 엄마가 날 크게 혼내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또 엇나갈까봐 참았던 것 같다. 우리 엄마 성격에 이건 있을 수 없는 인내인데. 무척 미안했던 나는 더 열심히 살았다. 7시 30분까지 병원 출근, 5시 30분 퇴근 후 6시 30분까지 고깃집 알바 출근, 새벽 1시 퇴근. 그렇게 살면서 졸업장도 따고 조무사 자격증도 땄다. 학원 담임 선생님이 너가 우리반 에이스라며 국시정도는 쉽게 붙을 수 있을거라 말할 정도로 열심히 살았다. 


15. 상황은 나아졌으나 마음이 나아지질 않았다. 나는 여전히 예전처럼 하기 싫은건 죽기보다 하기 싫었으며 억지로 하다 보니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너무 못됐지만 불안한 마음을 사람으로 풀었다. 어릴 때 남자애들한테 괴롭힘 당한 복수심도 있었다. 남자친구를 만들고 성에 안차면 이별을 통보했다. 너무나도 쉽게 쉽게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했다. 그 친구들에게 정말로 미안하다.


16. 나는 한 곳에 오래있지 못하고 계속 병원을 옮겨다녔다. 익숙한 일에도 그렇게 실수를 했다. 혼란스러웠다. 수박 겉핥기나마 공부로 간호를 배울땐 그렇게 재밌었는데, 실무에 뛰어드니 나는 지독하게 부족하기만 한 사람이었다. 어느날 자괴감이 들어 출근하다 말고 휴대폰을 꺼버린 뒤 당시 남자친구의 자취방으로 가 다 못잔 아침잠을 잤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남자친구에게 거짓말쳤다. 전에 퇴사했던 직원이 다시 근무한다고 하자 나를 잘라버렸다고.


17. 병원은 나에게 맞지 않는다며 판매직으로 들어갔다. 29살 현재까지 하고 있다. 백화점 화장품 판매직. 5년 경력인데도 실수가 잦다며 혼나기 일쑤다. 열심히 해 보겠다고 매일을 살았지만 동료들은 나를 자신들과 좀 다른, 특이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18. 내가 갈 수록 망가져 가는 것이 느껴졌다. 무기력증은 점점 더 심해지고 눈으로 보는 모든 것들이 머릿속에 입력이 안됐다. 소리가 한 데 섞여들려 상대방의 말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생각 났을때 하지 않으면 기억해내지 못할 나를 알기에 여러가지를 동시에 벌려놨다. 일을 하다가도 자주 눈의 초점이 흐려지며 머릿속이 텅 비었다. 매일 술을 먹으며 나를 달랬다.




최근 엄마에게 물었다. 사는 게 왜 이렇게 힘들까? 엄마는 크게 받아들이지 않은 듯 얘기했다. 니가 힘들게 사는거야.

그 길로 다음날 병원을 예약했다. 검사 예약날을 기다리는 동안 매장에서 한 번 울었다. 혼나는 와중에 후배 앞에서. 수치스러워서가 아니었다. 부족한 나 자신으로 인해 고생하는 내 동료들에게 너무 미안해서 울었다. 일주일 뒤 검사 결과는 ADHD가 맞았다. 검사 결과는 이게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최악이었지만 약과 함께 다시 한 번 힘내본다면 정상궤도에 오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움텄다. 


콘서타 18mg의 경과를 물어보는 의사 선생님에게 이렇게 대답했었다. 제가 ADHD라는걸 알고 열심히 살려고 해서 그런지 아직까지 큰 효과는 못느끼겠어요. 더 열심히 살아봐야죠. 의사 선생님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이미 충분히 열심히 살고 계시는걸요. 큰 뜻 없이 툭 던져졌을 말이 나에게 깊게 박혔다. 내가 열심히 살았다고 한다. 여타 남들과 같은 사람으로 인정 받는 기분이 들었다.


의사 선생님이 부모님에게 이야기 했냐고 하셨다. 못했다. 부모님꼐는 말할 수 없다. 나는 엄마 아빠에게 더 이상의 상처를 줄 수 없다. 내년에 결혼이 예정되어 있는 6년지기 짝꿍에게는 미안하지만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크게 부정적인 반응 없이 위로해줬다. 이정도면 됐다. 오로지 나 혼자 견뎌내야 할 문제임이 벅차기도 하지만 더 이상 주변에 피해를 주고 싶지가 않다.


이제껏 나는 그저 내가 실수가 잦고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그런 사람인 줄로만 알았다. 이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란 희망은 있지만 사실 자신은 없다. 약을 먹은지 1주하고도 이틀째지만 아직까지 남들이 말하는 것 처럼 개안한 느낌을 찾지 못했다. 아주 살짝 안개가 걷혔을 뿐 여전히 내 머릿속은 흐리멍텅하다. 그래도 더 나아지려 아등바등 노력중이다.


나는 잘 살지는 못했지만 열심히는 살았다. 라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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