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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HD와 함께 한 2020년을 마무리하며.
Level 2   조회수 198
2020-12-23 20:57:20

2020년 12월 23일이다.

마지막 글이 5월이었는데 벌써 2020년이 열흘도 채 남지 않았다니.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겠다.


콘서타 18로 시작한 나는,

콘서타 36과 메디키넷 5를 더해 현재 41까지 복용량을 늘렸고

오후엔 아토목세틴, 마지막으로 조울증을 잠재우기 위한 저녁약으로 이루어져있다.


그동안의 나는 매주 한번 병원에 가 상담을 하고 약을 처방받았다.

의사와의 대화는 상담이라고 말 하기 민망할 만큼 심플하다.

의사는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알고 있는데 

이를테면,

어제는 하루종일 기분이 좋더라구요, 그래서 자전거도 타고 친구도 한명 만났어요:)

하는 스몰 토크에 가까운, 의사가 가운만 입고 있지 않으면 이웃과 나누는 대화같은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지나간 봄과 여름, 가을, 이제 막 맞이한 겨울을 돌아보자면..


코로나로 인해 계획했던 일들 중 하나가 아직까지 홀딩상태로 남아있다.

사실 아주아주 사실은 나는 코로나라는 아주 좋은 핑계거리를 하나 잡은 듯 하다.

ing상태로 남겨두어야만, 아직 실패한 것은 아니라고 나를 다독일 수 있고

다시 언제든 돌아갈 수 있다는 자기암시도 걸 수 있으니.

하지만 스리슬쩍 밀려오는 패배감은 어쩔 수 없다.

과연 남들에겐 아무것도 아니지만 내겐 전쟁같은 계획을 끝끝내 마무리 짓기 위해 나는 되돌아 갈 것인가?

하고 스스로에게 묻는다면

잘 모르겠다는 답이 나오기 때문이다. .. 쓸쓸해진다.

아, 그래도 일단은 홀딩은 홀딩이다. 

동기와 열정이 다시 생기거나, 누군가가 불어넣어 주거나 (사실 이 효과는 미비하지만), 정말 큰 마음을 먹고

스스로 움직일 수도 있으니까 아직은 홀딩으로, 코로나 핑계를 실컷 대고 있다.


그리고 올해의 나의 여름은,

여름을 통째로 날려버리게 만든, 지나간 인연으로 점철되어있다.

헤어지라 권하진 못하지만 의사는 늘 나를 중심으로 상담을 하며

불안을 느끼는 현재, 슬픔을 느끼는 현재, 분노를 느끼는 현재를 모두 인정하고

무언가가 잘못되고 있음을 알아차리라 했었다.

난 나의 매몰비용으로 인해 놓아버리지 못하다가, 마음이 갈기갈기 찢긴 채로 홀로 남겨졌었다.

현재에 집중해라, 상대는 신경 쓰지말고 현재 내가 무엇을 해야하는가를 생각해라.

의사의 권유와 여기저기 붙여놓은 포스트잇들은 무시하지 않으려 애써도 무시되었던 날들이었다.


몇 달이 지난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자면 속상해 울기만 했던 내 모습이 대번에 떠오른다.

나는 결코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원했으며, 무엇을 확인받고 싶어서 그렇게 매달렸을까.

그때의 고통스러운 연애로 인해 나는 정신이 몸을 지배한다는 게 뭔지 혹독하게 알아버렸다.

체중이 줄고 스트레스로 인해 피부가 엄청나게 뒤집어지고 불면에 시달려 매일매일이 멍한 상태의 악순환.

댓가는 면역체계의 무너짐이었다.


우습게도 그와의 관계가 끊어지는 순간이 몸에겐 선물이었는지

한달이 채 되지않아 내 피부는 정상으로 돌아왔고 수면의 질도 상승했다.


나는, 그와 헤어진 뒤 매일 아침 출근 전 한시간 전에 일어나 요가를 시작했다.

갑자기 왜 그런 계획을 세웠을까

정말로, 모르겠다. 어떤 동기가 생겨서 그런 행동을 시작했는지 정말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냥 눈을 떠보니 힘들었던 여름이 지나있고 선선해진 가을이 와버린 듯한 느낌, 또는 사실이었다.

타이밍 참 우습고 기가막히게도, 아침요가는 아주 자연스럽게 명상의 시간을 갖게 해주었다.

나름의 자가치유라고 해도 되려나- 

그를 떠올릴때면 늘 분노하던 나는 점점 진심을 다해 그의 안녕을 빌게 됐다.

이런 마음이 든 건 내가 내게 주는 이별의 선물과 성숙이었다고 생각한다.



여름이 지난 후 내 일상은, 재미없고 따분하고 오늘이 어제와 같고 내일도 오늘같을

지루하지만 좋게 표현하자면 평화로운 날들의 연속이었다.

병원에 가서 

한 주간 어땠어요 를 들으면, 드릴 말씀이 딱히 없어서

다 좋았어요- 평화롭고, 일상에 어떤 이벤트가 없었어요:) 할 수 밖에 없는 잔잔한 날들.

(ADHD를 완벽히 이해하는 내 가까운 친구는 일상의 잔잔함은 지루하지만 꼭 필요하다고 말해줬다. 왠지 고마웠다.)



그래서, 그렇게, 여름의 끝자락부터 오늘아침까지도,

출근 전 요가는 내 하루의 시작을 담당하게 됐다.

운동 후 출근해서 일 하고 집에 돌아오는 버스 안에선 멍때리며 피로를 날리고

집에 돌아와 해야할 일을 체크하면서 왠만하면 마쳐보려 노력하고

저녁운동도 왠만하면 하려 노력하고

수첩에 그날의 감상을 적고 

정확히 밤 10시에 눕는다.

주말도 왠만하면 지키려 노력한다. (사실 몸이 적응이 되어버렸다. 10시면 졸리다. 몸은 무섭다.)


이정도면 꽤나 괜찮은 날들을 보내고 있는 듯 하다.



* 3월부터 지금까지 복용한 약들이 간에 무리를 주었을까 걱정이되서

지난주에 간검사를 받아봤다.

결과는 정상이었다.

내게 약에 의존하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100퍼센트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다.

약을 끊으려는 노력이나 생각은 없느냐고도 묻는다면 아직은 없으며 앞으로도 왠만하면 끊지 않을 생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간검사를 진행했는데, 다행히 정상이지만 그래도 6개월에 한번씩은 검사를 받아봐야하나 싶다.

만약 언젠가 내 간에 영향을 미친다면, 그땐 어떻게 해야하나 조금 걱정은 되지만 그건 그때 생각하기로 한다.


** 늘 그랬듯 2020년을 잡고 싶을 줄 알았다.

ADHD치료를 시작했던 올해와

원인을 몰라 허둥댔던 지난 몇년들을 비교해서

올해에는 무엇을 이루었나 따지자면

솔직히 변한 건 없다. 무엇하나, 치료 전과 똑같이,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괜찮다.

2020년엔 좋았고, 아팠고, 괜찮아졌고, 지금은 평화로우니,

2021년에도 좋고, 아프고, 또 괜찮아지고 다시 평화가 올 것 같다.

이정도면 꽤 희망적이지 않나 싶다.


*** 오늘 의사와 약속한 내가 해야 할 일에 조금 더 노력하기로 한다.

이것이 새해의 새로운 다짐!




구구절절 그래서,

2020년을 견뎌 준 내게 메리크리스마스.

그리고 해피 뉴이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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