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2월 23일이다. 마지막 글이 5월이었는데 벌써 2020년이 열흘도 채 남지 않았다니.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겠다.
콘서타 18로 시작한 나는, 콘서타 36과 메디키넷 5를 더해 현재 41까지 복용량을 늘렸고 오후엔 아토목세틴, 마지막으로 조울증을 잠재우기 위한 저녁약으로 이루어져있다.
그동안의 나는 매주 한번 병원에 가 상담을 하고 약을 처방받았다. 의사와의 대화는 상담이라고 말 하기 민망할 만큼 심플하다. 의사는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알고 있는데 이를테면, 어제는 하루종일 기분이 좋더라구요, 그래서 자전거도 타고 친구도 한명 만났어요:) 하는 스몰 토크에 가까운, 의사가 가운만 입고 있지 않으면 이웃과 나누는 대화같은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지나간 봄과 여름, 가을, 이제 막 맞이한 겨울을 돌아보자면..
코로나로 인해 계획했던 일들 중 하나가 아직까지 홀딩상태로 남아있다. 사실 아주아주 사실은 나는 코로나라는 아주 좋은 핑계거리를 하나 잡은 듯 하다. ing상태로 남겨두어야만, 아직 실패한 것은 아니라고 나를 다독일 수 있고 다시 언제든 돌아갈 수 있다는 자기암시도 걸 수 있으니. 하지만 스리슬쩍 밀려오는 패배감은 어쩔 수 없다. 과연 남들에겐 아무것도 아니지만 내겐 전쟁같은 계획을 끝끝내 마무리 짓기 위해 나는 되돌아 갈 것인가? 하고 스스로에게 묻는다면 잘 모르겠다는 답이 나오기 때문이다. .. 쓸쓸해진다. 아, 그래도 일단은 홀딩은 홀딩이다. 동기와 열정이 다시 생기거나, 누군가가 불어넣어 주거나 (사실 이 효과는 미비하지만), 정말 큰 마음을 먹고 스스로 움직일 수도 있으니까 아직은 홀딩으로, 코로나 핑계를 실컷 대고 있다.
그리고 올해의 나의 여름은, 여름을 통째로 날려버리게 만든, 지나간 인연으로 점철되어있다. 헤어지라 권하진 못하지만 의사는 늘 나를 중심으로 상담을 하며 불안을 느끼는 현재, 슬픔을 느끼는 현재, 분노를 느끼는 현재를 모두 인정하고 무언가가 잘못되고 있음을 알아차리라 했었다. 난 나의 매몰비용으로 인해 놓아버리지 못하다가, 마음이 갈기갈기 찢긴 채로 홀로 남겨졌었다. 현재에 집중해라, 상대는 신경 쓰지말고 현재 내가 무엇을 해야하는가를 생각해라. 의사의 권유와 여기저기 붙여놓은 포스트잇들은 무시하지 않으려 애써도 무시되었던 날들이었다.
몇 달이 지난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자면 속상해 울기만 했던 내 모습이 대번에 떠오른다. 나는 결코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원했으며, 무엇을 확인받고 싶어서 그렇게 매달렸을까. 그때의 고통스러운 연애로 인해 나는 정신이 몸을 지배한다는 게 뭔지 혹독하게 알아버렸다. 체중이 줄고 스트레스로 인해 피부가 엄청나게 뒤집어지고 불면에 시달려 매일매일이 멍한 상태의 악순환. 댓가는 면역체계의 무너짐이었다.
우습게도 그와의 관계가 끊어지는 순간이 몸에겐 선물이었는지 한달이 채 되지않아 내 피부는 정상으로 돌아왔고 수면의 질도 상승했다.
나는, 그와 헤어진 뒤 매일 아침 출근 전 한시간 전에 일어나 요가를 시작했다. 갑자기 왜 그런 계획을 세웠을까 정말로, 모르겠다. 어떤 동기가 생겨서 그런 행동을 시작했는지 정말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냥 눈을 떠보니 힘들었던 여름이 지나있고 선선해진 가을이 와버린 듯한 느낌, 또는 사실이었다. 타이밍 참 우습고 기가막히게도, 아침요가는 아주 자연스럽게 명상의 시간을 갖게 해주었다. 나름의 자가치유라고 해도 되려나- 그를 떠올릴때면 늘 분노하던 나는 점점 진심을 다해 그의 안녕을 빌게 됐다. 이런 마음이 든 건 내가 내게 주는 이별의 선물과 성숙이었다고 생각한다.
여름이 지난 후 내 일상은, 재미없고 따분하고 오늘이 어제와 같고 내일도 오늘같을 지루하지만 좋게 표현하자면 평화로운 날들의 연속이었다. 병원에 가서 한 주간 어땠어요 를 들으면, 드릴 말씀이 딱히 없어서 다 좋았어요- 평화롭고, 일상에 어떤 이벤트가 없었어요:) 할 수 밖에 없는 잔잔한 날들. (ADHD를 완벽히 이해하는 내 가까운 친구는 일상의 잔잔함은 지루하지만 꼭 필요하다고 말해줬다. 왠지 고마웠다.)
그래서, 그렇게, 여름의 끝자락부터 오늘아침까지도, 출근 전 요가는 내 하루의 시작을 담당하게 됐다. 운동 후 출근해서 일 하고 집에 돌아오는 버스 안에선 멍때리며 피로를 날리고 집에 돌아와 해야할 일을 체크하면서 왠만하면 마쳐보려 노력하고 저녁운동도 왠만하면 하려 노력하고 수첩에 그날의 감상을 적고 정확히 밤 10시에 눕는다. 주말도 왠만하면 지키려 노력한다. (사실 몸이 적응이 되어버렸다. 10시면 졸리다. 몸은 무섭다.)
이정도면 꽤나 괜찮은 날들을 보내고 있는 듯 하다.
* 3월부터 지금까지 복용한 약들이 간에 무리를 주었을까 걱정이되서 지난주에 간검사를 받아봤다. 결과는 정상이었다. 내게 약에 의존하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100퍼센트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다. 약을 끊으려는 노력이나 생각은 없느냐고도 묻는다면 아직은 없으며 앞으로도 왠만하면 끊지 않을 생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간검사를 진행했는데, 다행히 정상이지만 그래도 6개월에 한번씩은 검사를 받아봐야하나 싶다. 만약 언젠가 내 간에 영향을 미친다면, 그땐 어떻게 해야하나 조금 걱정은 되지만 그건 그때 생각하기로 한다.
** 늘 그랬듯 2020년을 잡고 싶을 줄 알았다. ADHD치료를 시작했던 올해와 원인을 몰라 허둥댔던 지난 몇년들을 비교해서 올해에는 무엇을 이루었나 따지자면 솔직히 변한 건 없다. 무엇하나, 치료 전과 똑같이,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괜찮다. 2020년엔 좋았고, 아팠고, 괜찮아졌고, 지금은 평화로우니, 2021년에도 좋고, 아프고, 또 괜찮아지고 다시 평화가 올 것 같다. 이정도면 꽤 희망적이지 않나 싶다.
*** 오늘 의사와 약속한 내가 해야 할 일에 조금 더 노력하기로 한다. 이것이 새해의 새로운 다짐!
구구절절 그래서, 2020년을 견뎌 준 내게 메리크리스마스. 그리고 해피 뉴이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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