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말이나 하겠다.
언제나 그렇듯 아무말이 최고의 오프닝 워드다. 적어도 우리에게.
간결하고 차분하고 조리있게 말하는 스킬은 후천적으로 연습해서 직업적 자아에 써먹고 있다, 많은 친구들이 그럴테지요?
아무말에는 실수 퍼레이드 소개가 최고다. 나와 타인 사이의 긴장을 없앤다.
A클럽의 멤버 소개들을 보면 나는 ‘부주의형’에 속한다. 내 가족, 친구 중 나보다 충동성이 강한 사람은 보지 못했을 정도로 충동성이 강하지만 그렇다고 Adhd의 구태의연한 스테레오 타입 이미지처럼 충동적이진 않다. 이를테면 수업 시간에 교실 밖으로 나가버리거나 고함을 지르는 남아 이미지? 충동이 많긴 하지만, 부주의로 인한 일상의 불편이 더 많다면 ‘부주의형 adhd’로 분류되는 듯 하다.
부주의함은 매일 반복된다. 당연히 잔소리 들을 일이 산더미다. 이번 한국 방문에서 식사 후 내가 쟁반에 반찬 그릇을 담아 주방으로 갈 때마다 어머니는 한번도 빠짐없이 외쳤다. “힘 딱 주고 잘 들어.”
어릴 적, 어머니가 부침개나 잡채를 담아 이웃집으로 심부름을 보내곤 했다. 나는 자주 대문턱에 걸려서 접시를 깨빡쳤다. 아니면 전달을 마치고 나서 긴장이 풀려 “엄마아아아! 잘 다녀왔어!” 하고 손을 흔들다 대문에서 걸려 넘어지거나. 델몬트 유리병에 담긴 보리차는 번번이 내 발에 걸려 마루에 흘러넘쳤다. 몸도 쪼끄만 애가 손발에 칼이 달렸냐고들 했다.(내가 어릴 적에는 이런 표현이 있었다) 이런 나의 유년기 기억이 모친에게 남아있는 것이렸다!
실수를 막으려 온갖 노력을 한다. 요리나 빨래를 할 때마다 타이머 시계 알람을 맞춘다. 주방에는 포스트잇이 여러개 붙어있다. "은성씨! 태우지 마세요!" 두꺼운 미국식 머그를 몹시 사랑하지만 아침 커피는 머그컵 대신 뚜껑 달린 텀블러로만 마신다. 아침에 특히 비각성 상태가 심하니까.
불어학교의 한 친구는 나를 '블랙걸'이라고 부르곤 했다. 까만 후디에 까만 레더재킷을 입고 다녀서다. 매운 음식을 좋아하는 한국인으로서 최선의 선택은 블랙이다. 더운 여름에도 까만 윗옷을 입는다. 흰티 금지다.
프랑스로 이민 온 후에는 증상이 몹시 심해졌다. 당연하다. 잘 모르는 일은 우리 클럽 사람들에게 매번 도전이다. 특히 '단계를 차분히 따라가야 하는 일' 이를테면 설명서를 따라 기계를 조작하는 일, 행정이나 은행 일 등은 나에게 지루하고 어렵다. 수시로 멍-해진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학원 등록이나 병원 예약 같은 사소한 일도 실수 공포에 사로잡힌다. 불어를 크롬 자동번역으로 한국어로 읽고 단계를 따라하지만, 한국어로 하는 일에 비해 뇌 속이 뿌옇게 흐려진 느낌이 든다. 실수보다 실수를 두려워하는 예기불안이 더 문제다. 그래서 프랑스 관련 일은 반드시 최종 단계에서 파트너에게 컨펌을 받는다. "나, 제대로 한 거 맞아?"
여러 가지의 장치를 두어도 매일 나는 실수를 엄청 한다. 아니, 고친다고 다 고쳐지면 이게 병이 아닐테지.
그럴 땐 아무리 생각해도 웃어넘기는 게 최고다. 교정은 좋지만, 심각하게 반성하기 시작하면...우울에 빠져든다. 유머와 긍정이 최고인데, 이때 긍정은...자연스럽게 되면, 다시 말해서 이게 병이겠나요? 그래서 억지긍정이라고 부르는 기술을 사용한다.
‘억지긍정’이 최고다. 억지여도 긍정은 긍정이라 계속 하면 몸에 밴다.
뇌는 단순하다. 소리내어 말하면 뇌는 그런가 보다 한다. 아까는 사흘만에 만나는 파트너가 반가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 달려가다 빈티지 가구에 컴블러 속 커피를 뚝뚝 흘렸다. 흡수력이 좋은 나무인지 커피 방울 8개가 무늬가 되었다. “아름답다!” 외친다.
일주일 전에는 세탁기 속 빨래를 하루 지나도록 꺼내지 않아 파트너의 후디에 쉰내가 배자 가족은 부탁했다. “은성씨, 제 빨래 해 주지 마세요.” (그는 외국인이다) “땡큐! 아싸, 가사가 줄었다.” 이건 얄미울 수 있으니 혼잣말로만 하자. 그리고 쉰내 빼는 방법을 찾아 복구해주기.
삼년 전에는…휴. 건강을 위해 브로콜리를 굳이 쳐먹겠다고(아 말이 곱게 안 나온다) 전자렌지에 돌리고는 7일 후에 발견했다. 작업실이었는데 휴가 기간이어서 사람이 없어 아무도 못 본 것이다. 8월 삼복더위였으니….브로콜리의 상태는 이하 생략이다. J언니가 함께 치워주었다. 언니가 놀라는 티를 숨겨주어 고마웠다. 철렁했던 마음이 잔잔해졌다.
우리는 더 친해졌다. “야! 오늘도 우정을 새로 발견했어.”
아, 어제는 폴라로이드 사진의 테두리를 칼로 쳐내다… 식탁보를 베었고…뒷면에 스카치테이프를 붙였다. 사진 뽑는 게 넘너무 넘너무 즐거워서……부주의력을 조심할 정신이 없었던 거다. 그렇다.
우리는 반가운 이를 만나면 종종 비글처럼 신이 나서 그만…..손을 휘젓다 맥주잔을 쳐 버리거나 뜨거운 냄비에 굳이 손을 데거나 앞머리를 자르다 점점 신이 나 처피뱅이 되거나…
이건 충동성인가? 아무튼 내 안에 있는 것이니 충동인지 부주의인지 엎어치나 메치나.
앞으로 저 식탁보 세탁은 반드시! 내가 해야만 한다
절대 들키지 않으리. 아, 이건 억지긍정이 어렵다. 이까지는 무리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