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제가 최근 느낀 바를 적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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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뭘 쓰는 걸 정말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특히 그게 암기용이라면. 나한테 맞춰진 최악의 벌이 있다면 아마 깜지가 아닐까.
어릴 때는 adhd여도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멀티태스킹만이 요구되었기에 그때까지는 괜찮았다.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고, 그 안에서 많은 직책을 맡게 되면서 더 이상 머리로만 할 수는 없다는 걸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면 머리에 우겨넣기에는 좀 많다고 느꼈다. "할 수 없다" 고 느끼는 것 자체로 패배하는 기분이었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그 생각만큼은 부정하려고 했던 것 같다.
선배한테 뒤지게 혼났다. "왜 다 잘해놓고 마지막 마무리를 빼먹어서 내가 한 번 더 점검하게 만드냐" 는 것이었다. 변명할 여지 없는 내 잘못이었다. 엄청나게 자책했다. 선생님한테도 뒤지게 혼났다. "성적도 좋은 새끼가 왜 수업시간에 자꾸 조느냐" 는 것이었다. 역시 내 잘못이었다. 하루에 몬스터 세캔을 붓고, 아령을 손에 들고, 시기로 유명한 사탕을 먹어가면서 안 졸아보려고 했지만 안됐다.
그렇게 나는 다른 사람에게도, 그리고 나에게도 게으르고, 노력도 안하는, 지가 좋아하는 것만 챙기는 이기적인 새끼가 됐다.
그 다음은 강박이었다. 나는 나를 포기하지는 않았다. 대신 엄청나게 나 자신을 후려쳐 가면서 "너는 멍청하니까 전부 다 기록해야 해" 라고 나 자신에게 주입했다. 그 결과, 같은 계획을 달력에 한 번, 스케줄러에 한 번, 스터디 플래너에 한 번, 구글 드라이브에, 투두 메이트에, 노션에, 총 5번을 적는 계획 강박이 되었다. 물론 그런다고 상황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다들 알겠지만, 그리고 느꼈겠지만 이건 노력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었기에 같은 내용을 5번 적는 노력은 그대로 수포로 돌아갔다.
그리고 나서야 adhd를 의심해보게 되었다. 이미 내 자존심이며, 정상적인 사고회로가 다 너덜너덜해진 뒤였다.
adhd를 진단받고 나서 기록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됐다. 저 기록들은 왜 나를 돕지 못했을까. 내 기록이 아니었으니까. 다른 사람들이 준 것을 그대로 받아적었을 뿐이었으니까. 저 기록에 "나"는 없었다. 결국 다 나를 위한 거야, 라고 암기하다시피 했을 뿐, 진심으로 그렇게 받아들인 것이 아니었다. 간단히 말해서 저 기록들은 조언을 준 사람들에 대한 의무감으로 받아적은 것일 뿐, 필요성도 매력도 느낄 수 없는 문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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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백수가 됐다. 그러고 나니 "나의 생각"을 할 짬이 생겼다.
내 꿈을 적었다. 아무도 볼 수 없는 곳에. 누군가는 속물같다고 욕할 수 있는 꿈이더라도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오로지 내 희망을 적었다.
내가 바라는 이상적인 생활을 적었다. 역시 아무도 볼 수 없는 곳에. 누군가는 비현실적이라고 욕할 수 있더라도 그저 내가 생각하기에 멋진 생활을 적었다.
직접 생각하고 적는 것은 받아적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진심으로 저렇게 되고 싶었다. 적은 대로 이루고 싶었다. 그리고 정말로 일상이 바뀌었다. 오후 4시에 일어나던 사람이 오전 4시에 일어났다. 컵라면이 주식이던 사람이 직접 세끼를 요리해 먹었다. 탄산음료에 중독되다시피해서 1년에 20kg씩 찌던 사람이 탄산을 끊고 몸무게를 감량했다. 침대에 하루종일 누워있던 사람이 책상에 앉고, 바깥으로 나가게 되었다.
더는 계획에 집착하지 않았다. 여전히 전에 쓰던 플래너, 드라이브, 노션, 투두 메이트를 쓴다. 그래도 이제는 집착하지 않는다. 플래너에는 공부할 내용을. 투두 메이트에는 공부와 일과 중 까먹으면 안되는 내용을. 드라이브에는 내 희망을. 노션에는 이상적인 삶을 적었다. 겹치는 내용도 있겠지만 굳이 신경쓰지 않았다. 작성에 의무감을 느끼지도 않는다. 필요에 의한 기록일 뿐, 오늘 작성하지 못한다면 내일 작성하면 되는 것이고, 작성할 내용이 없으면 굳이 작성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생각이 아닌 내 생각을 가지면서 삶이 완전히 바뀌었다. 도덕이니 성실이니 하는 것들을 전부 지웠다. 왜 생겼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떠맡았던 의무감들에게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기분이 확 안좋아지거나 무기력해지는 때가 온다. 그래도 전보다는 낫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