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나로부터 시작한다. 나는 어딘가에 “푹 빠지는” 성향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제 돌이켜보니 “푹 빠지면 다른 건 챙기지 못하는” 편이었다. 중학생 때는 좋아하는 드라마를 P2P 사이트에서 다운 받느라 해가 뜨는 시각에 잠들기 일쑤였고(체력이 좋았다) 고등학생 때도 공부할 때 들을 음악을 찾느라, 좋아하는 아이돌의 새 소식을 업데이트하느라 많은 것들을 제쳐뒀다. 그나마 체면, 학교 생활에 의해 일상을 유지했다. 충동적으로 그때그때 좋아하는 것들을 만들면서 요령껏 시험 보는 법을 익혔다. 대학에 와서도 방학 때는 200편이 넘는 드라마와 영화를 봤는데, 어느 날 강의에서는 자기소개로 그런 취향을 언급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같은 영화를 수십 번 돌려보는 종류의 오타쿠는 아니었다. 4분 20초짜리 노래를 들을 때 1분 30초를 고비로 노래를 넘겨버리는 유형의 사람이었으니까. 언젠가부터는 나라는 사람의 전체 능력치를 증명하고 싶다는 욕구에 휩싸였다. 제발 삼천포로 빠지지 않고, 공부 외적으로 무언가 탐닉했던 에너지를 모아서 한 가지에 몰두한다면, 성과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나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다고 자신했으나 내 판단력은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적어도 충동적인 성향으로서 택해서는 안 되는 시험에 뛰어들기도 했다. 실현 가능한 전략 없이 아이 같은 포부를 지닌 채 시작했던 공부는 불안의 늪이었다. 조여오는 불안감이 나를 또 다른 세계로 이끌었다. SNS와 쇼핑이 그 영역이었다. SNS를 하지 않으려고 세이프박스라는 자그마한 금고 형태의 장치를 사기도 했으나 SNS에서 그 어느 때보다 불안하고 충만한 기쁨을 느꼈다. 중고 거래 플랫폼에 빠져 몇 시간을 몰두해 그동안 존재조차 몰랐던 물건 브랜드에 관심을 가지고 갖은 서치를 반복한 끝에 한 시간 내외의 거리도 씩씩하게 걸어다니곤 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는 방식으로 스스로 거래를 막으려 했으나 오히려 3시간 이상 걸어다니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이색적인 경험이었지만, 즐거웠던 만큼 후회나 자괴감의 꼬리가 길었다. 언제나 내가 좋아하는 것, 내 취향에 빗대어 스스로를 표현했지만 실은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부터 나를 보호하고 싶었다. 부디, 내가 장기적인 우선순위를 먼저 챙기는 사람이길 바랐다. 그러면서도 나는 어떤 증상과는 거리가 먼, 다소 충동성이 강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원래 기질이 그러하다고 생각했다. 돌아보면 나름의 대처 방식을 취했던 것이기도 하다. 살면서 겪은 곳곳의 스트레스에 대처하기 위해선 나름의 몰두가 필요했다. 어느 순간 그 기분 조절이 우선이 되어 목적의 전도가 주를 이뤘다. 매 순간 나는 불안과 외로움, 내가 해야 하는 일들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해왔다.
사실 탐닉은 별 깊이 없는 일들이었다. 나는 창작자도 아니고, 열렬한 신봉자도 아니다. (세상은 넓고 행동하는 오타쿠는 많다) 그저 이런 저런 것들을 소비하는 데 기운을 썼던 사람이다. 전에는 뭔가에 빠지지 않고, 취향을 만들지 않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으나 이제 보니 그들은 견고하게 자신의 영역을, 일상의 테두리를 지킨 사람들이다. 언제나 풍덩 연못에 뛰어든 뒤에 젖은 몸으로 어찌할 바 모르는 건 나 자신이다. 이제는 약도 먹고 이게 증상이라 생각하며 나를 바꾸려고는 하는데 기질에 습관, 감정이 겹겹이 나를 구성했던 탓에 우선순위를 세우고 행하는 게 아직도 늘 버겁다. 내 미래를 고민하면 도저히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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