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경쟁률 높은 시험 몇개를 어찌어찌 잘 통과하고 그 덕에 먹고살게 된지 몇년 후에야 제게 ADHD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고군분투하며 공부하는 분들을 위해 제 경험을 나누려고 합니다. 1편과 2편은 앞에 있습니다.
오늘은 공부시간 확보를 비롯한 종합적인 시간관리에 대한 얘길 해볼게요.
미루기 대마왕에 만성 지각대장이었던 저에게는 전업 수험생으로서 꼭 해야 하는 이 시간관리라는 것이 너무 어려운 일이었어요. 수험기간 내내 제가 가장 고통스럽게 느꼈고, 결국 해결하지 못한 채로 공부를 끝내게 됐던 부분이고요. 그래서 저의 경험과 시행착오들과 함께, 나중에야 알게 되어 지금은 제가 일을 할때 쓰는 방법들을 섞어서 얘기해볼게요.
위 사진은 제가 수험생활 중 쓴 시간 기록 중 일부인데, 마침 이 해에 쓴 다이어리가 이렇게 차트처럼 기록할 수 있는 페이지가 있어서 한눈에 들어오기에 올려봅니다. 봄철엔 그래도 공부를 좀 해서 하루에 5-6시간도 찍은 날이 있는데, 연말쯤 가면 도통 공부가 되지 않아서, 자세히 보면 공부시간 차트를 위해 사용한 두 칸 중 한칸의 기준이 여름까진 4시간이었다가, 연말로 갈수록 3시간, 2시간으로 줄어들었죠ㅠㅠ 마지막 11월-12월경의 상태가 제 원래 평균에 가까운 시간이예요. 그나마 이 정도를 하는 것도 제 나름대로는 부단한 노력의 결과였답니다ㅠㅠ
요즘은 공부시간을 어떻게 측정하나요? 제가 공부할 때에는 모든 사람이 스톱워치를 썼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였고요. 하지만 스톱워치를 써서 만족스러운 공부시간을 확보한 적은 한번도 없었어요, 위에서 보셨다시피(..) 그냥 스톱워치로 시간을 재고 목표 시간을 채우는 방법은 우리한테는 별로 안좋은 방법인 것 같습니다. 저는 자기혐오와 자책만 늘었어요ㅠㅠ 이 글을 읽는 분들도, 책상에 붙어있었던 시간 같은걸 기준으로 삼아서 자신을 미워하거나 하진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지금은 일할때나 좀 진득하게 뭔가 붙잡고 해야 할 때 유명한 뽀모도로 기법을 쓰고 있는데, 이거 그런대로 괜찮습니다. 딱 이거다 라고 말하기 어려운 이유는 쉬는시간에 아예 시계를 멈추고 한참 놀아버리는 일이 종종 있기 때문이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괜찮은 것 같아요.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중간중간 주의를 돌리는 시간이 꼭 필요하더라고요. 어차피 뽀모도로 시간을 넘어서 길게 집중하는 경우도 별로 많지 않고요. 다만 뽀모도로 타이머 앱들은 보통 진동으로 시간 알림이 오는데, 저는 사무실에서 쓰니 괜찮았지만 조용한 독서실 환경에서는 어떻게 해야할지 좀 의문스럽긴 하네요. 진동까지 끄고 무음모드로 화면이나 램프가 깜빡깜빡 해서 알림을 주는 설정도 앱에 따라서는 아마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가 방금 찾아보니, 제 안드로이드 폰에서 쓰는 "토마토 시계(뽀모도로)"라는 앱의 경우는 진동을 끌수 있고 LED가 깜빡여서 표시되게 하는 설정도 있는 것 같아요. 이 앱의 경우는 딱 시계 기능만 있지만 시간 설정도 25분-5분 외에 다양하게 할 수 있고, 집중시간과 휴식시간을 한번 터치로 넘어갈 수 있어서 쓰기 편했습니다. 뽀모도로 타이머 앱이야 뭐, 워낙 많으니까요.
자리에 앉아서 버티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자리에 가서 앉는 일이죠. 저는 그 부분의 대책은 끝내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지금까지도 고생하고 있어요. 그나마 효과가 있었던 건, 쉬운 과제 하나를 설정하고 그 과제를 하기 위해 일단 가서 앉는 것이었어요. 방금 말한 뽀모도로 타이머도 '일단 이거 한타임 넘기자'라는 작은 목표가 될 수 있겠죠.
공부하는 분이라면 다들 하시는 일이겠지만, 우리는 모두 여러개의 과목들과 방대한 진도를 수험기간에 맞춰 적당히 나눠 일정한 기간별로 목표를 잡고, 그 기간의 매일매일로 목표를 나눠 할당하지요. 그리고 그 목표를 달성했다면 자신을 칭찬하고 작은 보상을 준다는 것 까지도 일반적인 수험 팁으로 알려져 있는 것이예요. 저도 그렇게 했답니다, 그날의 목표를 전부 달성한 적은 한번도 없었지만ㅠㅠ
당시의 저는 ADHD는 몰랐지만,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죠. 그래서 저는 매일의 목표를 3-5개 정도로 나누어 잡았답니다. 첫번째 목표는 진짜 인간적으로 이것도 안하면 좀 너무했다 싶은 정도의, 길어야 한시간이면 할 수 있는 정도의 아주 가벼운 목표, 두번째 목표는 이정도면 양심적으로 그래도 오늘 공부를 했다고는 할 수 있을 것 같은 정도의 적당히 가벼운 목표, 세번째부터는 좀더 시간과 노력이 들고 해냈다면 오늘하루 괜찮게 보냈다 싶은 정도의 목표, 네번째부턴 초과달성이고 특별한 보상이 필요한 정도로 진도나 분량, 난이도를 조정했어요. 첫번째 목표를 지키지 못한 날은 거의 없고, 세번째까지 갈 수 있는 날은 반반 정도였던 것 같아요. 네번째까지 가는 날은 거의 없었고요. 이건 지금까지도 비슷하게 하고 있고, 이제 와서 되돌아봐도 작은 보상이 자주 필요한 ADHD의 성향에 잘 맞았던 방법인 것 같습니다.
공부할 때 제가 가장 신경을 쓴 것 중 하나는 규칙적인 생활을 하며 컨디션을 관리하는 것이었어요. 저는 아프건 힘들건 불굴의 의지로 공부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서, 아프거나 졸리거나 피곤하거나 아무튼 컨디션이 나쁘면 아무것도 하기 싫고, 그 핑계로 더 빈둥댈 궁리만 하니까요. 다행히 저는 수면장애가 없어서 유독 잠들지 못하는 날이라도 1-2시이고 아무리 늦잠을 자도 8-9시였기 때문에, 규칙적인 생활을 지키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잘 먹고 잘 자고 절대로 무리하지 않는 것이 저에게는 건강을 유지하는 방법이기도 했고, 지속 가능한 공부를 하는 방법이기도 했어요. 운동도 마찬가지로, 저는 원래 잘 걷고 많이 걷는 편이긴 하지만 공부할 때는 하다못해 식후 동네 산책이라도 하면서 일부러 더 움직이려고 노력했어요. 우리는 유산소 운동을 해주는 게 좋다고 하죠,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헬스장에서 덤벨과 기구를 어떻게 해보려고 애쓰다 좌절하고 안나가고 그러지 말고 꾸준히 러닝이나 열심히 해볼걸 그랬어요.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고 싶은건 정신건강의 관리 문제입니다. 저는 자신이 ADHD인줄도 모르는 채로 나는 왜 의지력이 없는가 고민하고 자책하며 수험기간을 보냈으니 조금 더 어려운 상황이었긴 한데, 이제 와 생각하면 그땐 우울증도 좀 있었던 것 같아요. 그게 기약없는 공부를 하는 수험생은 원래 다들 힘들고 불안하고 우울하고 그렇긴 하죠. 그때 저는 정신건강을 관리하기 위해, 이런 생각들을 하려고 노력했어요. - '내가 빨리 합격을 하는게 가장 큰 효도이다'. 저는 집이 부자가 아니라서 사실은 제가 그렇게 오래 공부를 하면 안 됐는데, 그냥 했습니다. 그와중에 알바 한번 안 하고 꼬박꼬박 용돈 받아 썼어요. 부모님께 보탬이 되겠다고 알바 하다가 합격이 늦어지는게 더 불효라고 생각했거든요. (참고로 저의 친구는 지금 크게 두 부류로 나뉘는데, 제가 공부하는 걸 기다려준 친구들과 저와 같이 공부를 했던 친구들입니다. 그건 사실 친구가 별로 없어서;;;이긴하죠;;;)
- '나는 잘 하고 있다, 어제도 1단계 목표를 달성한 걸 보면 알 수 있다'. 위에 설명했지만 1단계 목표는 정말 쉬운겁니다. 그래도 뭐라도 했잖아요? 꾸준히 했다는 점이 중요한거예요.
- '나는 열심히 공부했으므로 이 작은 보상을 얻을 자격이 있다'. 열심히 공부했다는 평가는 각 단계의 목표를 달성한 것들을 기준으로 하고, 작은 보상은 야구를 생중계로 보는 것이나 맛있는 후식을 먹는 것, 가끔은 계획해둔 휴일에 어딘가 놀러가는 것 등이었습니다. 아 맞다 휴일 중요해요, 진짜 중요하니까 꼭 계획에 추가하고 꼭 지키세요.
그리고 진짜 마지막으로, 정신건강 관리 문제와 연결되는 건데, 저는 성인이 되어서 수험생활 하는 분들은 여건이 되는 한 부모님과 떨어져 사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함께 살더라도 집 밖에서 공부하시고요. 저는 수험기간 내내 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학원과 독서실을 다녔는데, 이게 참 힘들었습니다. 부모님 생각하시기엔 얘가 열심히 공부를 한다고 하려면 새벽같이 나갔다가 밤중에 들어온 다음 쓰러져 잠들었다가 다시 새벽같이 나가야 하는데, 저는 해 뜨면 일어나서 느릿느릿 밥을 먹고 라디오도 좀 듣고 하면서 느릿느릿 준비를 하더니 어정어정 나갔다간 한 아홉시 열시 되면 휘적휘적 들어와서 드라마도 보고 폰과 컴퓨터로 뭘 또 막 하다가 밤에는 잠이 안 온다며 혼자 꼼지락거리고 있었으니...답답하셨겠죠. 그걸 뻔히 아는 저의 마음도 불편하고요. 그나마 제가 독서실을 다녀서 불안한 평화가 유지됐지만, 한두번 정도는 서로 폭발해서 엄마랑 붙들고 멜로드라마 찍는 그런 날도 있었습니다. 이 글에 공감을 느끼는 분이라면 분명 저와 같은 트러블을 겪을 위험이 있다고 생각해요. 솔직히 부모님이 보시고 '아 우리 애가 공부를 열심히 하는구나'라고 흡족해하실만큼 강렬하게 공부할 자신 없잖아요. 뭐 그런 이유에서 하는 소리입니다...
저는 어릴때부터 좀 이상한 애였고, 지금도 역시 좀 이상한 애라고 생각해요. 다들 '좀 이상한 애'였던 사람들이 어른이 되어 모여 있는 여기에서도, 우리는 어떤 점에서 닮았지만 또 많은 점이 다르죠. 그래서 저의 경험은 저의 경험일 뿐이고 저의 방법들은 저에게 유효한 것이었을 뿐 다른 사람에게는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저의 경험과 시행착오들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면 기쁜 일이고, 설령 아무 참고도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적어도, 저처럼 집중력도 없고 외우는 것도 못 하고 공부시간도 못 버티는 이런 사람도 시험공부를 하고 심지어 운때가 맞으면 합격도 해서 이렇게 잘 살고 있다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용기가 되고 위로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런 분이 한분이라도 있다면 이 글은 목적을 달성했어요.
수험생 여러분 응원합니다. 님들은 잘 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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