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후배A가 있었다. A와 나는 대학 시절 무척 친한 편이었다. 유머코드도 잘 맞아서 여러 가지 재미난 추억을 많이 가지고 있다. 내가 A와만 친했던 건 아니지만 그와 내가 친한 건 주위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30대 중후반쯤이었나, 오랜만에 재회할 일이 생겼고 우린 반가워했다. 그 나이가 되면 사실 서로 만날 때마다 장난을 친다든가 시덥지 않은 농을 던진다든가 하지는 않는다. 둘 다 일하는 프로로서 만난 것이기도 했고, 진지한 얘기가 훨씬 더(여기서 진지하다는 건 심각한 얘길 말하는 게 아니다. 그냥 일상다반사를 평범하게 나누는 것) 어울리는 나이이기 때문이다. A가 다른 선배에게는 전혀 그러지 않으면서 나에게만 장난을 걸고 있었다. 한마디 한마디가 가벼운 장난식의 말이었고 나와는 도무지 평범한 대화를 하려 들지 않았다. 내가 어떤 말을 건네면 그 말을 어떻게 위트있게 받아쳐줄까 고심하고 내뱉는 느낌이었다.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그렇다고 특별히 예의 없이 군 건 아니고 분위기도 내내 화기애애했기에 내가 느낀 불쾌함의 원인이 뭐고 어떻게 설명해야 되는지 당시로선 파악이 어려웠다. 불편감과 답답함이 누적되다 보니 조금씩 만남을 피하게 되었다. A는 이해를 못 했고 무척 아쉬워했다. 아침누나가 왜 자기를 피하는지 의아해했다. 그간 느껴온 감정을 힘들게 전했다. 네가 나를 무시하는 것 같다. 다른 내 동기들이나 심지어 후배들을 대할 때도 멀쩡하게 말 잘하는 네가 나만 보면 농담만 하려 해서 내가 무슨 말을 못하겠다. 나도 힘든 거 있고 진중한 이야기 나누고 싶은데 너와 도대체 대화를 할 수가 없다. 이게 나한텐 스트레스라 너와의 만남이 편하지 않았다... 라고 나름 정색하고 말했다. (말하는 데까지 아주 힘들었다. 나름 냉각기도 가져보고 우여곡절이 있었다) A는 조금 놀랐고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그리고 이해했다. 자기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다른 선배들한테는 안 그러는데 누나만 보면 괜히 장난을 치고 싶더라. 무슨 말인지 잘 알겠고 누나에게 너무 미안하다. 앞으로 절대 그러지 않겠다.. A는 진심으로 뉘우쳤고(이걸 의심하지는 않는다. 정말 미안해했다) 한동안 내 앞에서 장난본능을 누르려 애쓰는 게 잘 보였다. 한동안은.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자 A는 원래의 모습으로 조금씩 돌아갔다. 나만 보면 '만담'을 하고 싶어 근질거리는 게 느껴졌다. 일이 안 풀려서 죽고싶다는 내 말에 농담 섞인 반응을 보내왔다. 어느 새해 첫날 A가 ‘누나 새해 복 많아~~ㅋㅋ’라는 문자를 보냈고 분노가 폭발했다.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눈물이 마구 났고 몇 날 며칠을 씩씩대다 엉엉 울다를 반복하다 잠들었다. 샤워하다가 울컥 치밀어올라 허공에 대고 소리를 지를 정도였다. A가 다른 사람들한테 저런 말장난 문자를 보내지 않았음은 자명했다.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나니까 보낸 것이다. 나한테만. A는 사실 착한 친구다. 아주 순하고 바른 인성을 가졌다. 만약 누군가가 “A 걔 좀 별로지 않아?” 라고 묻는다면 “무슨 소리냐, 걔처럼 착한 애가 어디 있는데, 나 걔한테 도움도 많이 받았어”라고 나는 지금도 말할 것이다. A를 욕하려고, A가 얼마나 무개념인가를 성토하려고 이 글을 쓰는 게 아니다. A는 그럴 수밖에 없는 거였다.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안 그런 사람도 많고 대부분 나에게 안 그러지만 A로서는 아침이란 사람을 그렇게 대하는 게 자연스러운 거였다.
그걸 알게 돼서 서러웠다. 문제는 나에게 있었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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