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HD와 공부(1)- 집중력 깡통 조회수 866 2019-10-11 22:44:49 |
저는 공부 머리가 있습니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시험을 보는 데 재능이 있습니다. 고등학교때까지 항상 성적이 좋았고 수능을 잘 봐서 입결 높은 유명한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후 5년정도(평범한 정도의 준비기간임) 시험준비를 해서 합격했고 그걸로 지금까지 먹고살고 있습니다. ADHD 진단은 올해 받았고, 물론 치료도 최근에 시작했습니다. 일적 관계에서는 병을 알리고 싶지 않으므로 공개된 게시판인 이곳에 직업은 밝히지 않고 싶습니다. 짐작가는 분도 있으시겠지만 굳이 추측하지 않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가 공부를 해야 하는데 공부를 할 수 없어서 고통받기 시작한 것은 대학을 졸업한 이후부터입니다. 중고등학교땐 아무튼 정해진 수업시간이 있고 쉬는시간이 있으니 티가 나지 않았는데, 독서실에선 정해진 게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대학을 졸업한 후에 준비한 시험은 어딜가나 잘났다고 인정받는 애들도 몇년씩 전업으로 준비해서 보는 난이도 높은 시험이라 얼렁뚱땅 넘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저도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는데, 저는 공부를 열심히 할 수가 없어서 괴로웠어요. 그땐 ADHD는 생각도 못해봤고, 그저 나는 나태하고 목표의식도 없이 하루하루 밥만 축내는구나, 라고 생각하며 땅만 팠었죠.
하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어떻게든 해보려고 꾸역꾸역 어떻게든 해봤고, 다행히 좋은 결과를 얻었습니다. 여기도 공부해야 하는데 공부가 안돼 고민하는 분들이 여러 분 계신 것 같아서, 혹시나 참고가 될 수도 있으니까, 제가 그때 공부란 걸 해보겠다고 애를 썼던 이야기들을 공유해보려고 해요. 지금 생각으로는 글을 세개쯤 쓸것 같습니다. 나름대로는 정보글을 쓰는 심정이긴 한데, 무의식중에 자기자랑이 막 들어갈 수 있습니다(이미 들어가 있나?;;). 너그럽게 넘어가주세요.
오늘은 집중력 얘길 할게요.
자게에 쓴적도 있는데, 저는 머릿속에서 노래 나옵니다. 환청은 아니고 그냥 멜로디와 가사가 제멋대로 돌아다니는건데, 남들도 다 그런줄 알고 걍 살다가 약 먹은 후로 없어지길래 의사한테 말했더니 쿨하게 “잡생각이네요”라고 하시더군요. 겪어보신 분은 뭔지 아실거고, 안 겪어보신 분은 대충 수능금지곡 같은건데 아무노래나 다 그렇다, 또는 머릿속에 항상 bgm이 있다고 생각하시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뭐,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면, 잡생각이 노래라는 정리된 형태로 돌아다녀서 다행이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외엔 뭐... 저는 과집중은 거의 없는 것 같고, 대신 한곳에 집중하는걸 유독 못하고 포커스가 아무렇게나 날아다닙니다. 부모님께 혼나는 와중에 뒤에 있는 티비에 나오는 드라마에 정신이 쏠린다든지, 일을 하다 말고 뭔가 지엽적인 이슈 하나에 정신이 쏠려 그걸 연구하기 시작한다든지, 흔한 얘기지만 그런 것들이었네요 ㅎㅎ
하지만 공부를 하려면 강의를 들어야 하잖아요. 저는 강의를 그냥 듣고 있으면 생각이 저기 어디로 날아가 버립니다. 또는 눈이 사르르 감기거나요. 저의 경우는 교재를 펴놓고 강의를 듣는다, 로는 좀 부족하고 적당히 통제된 방법으로 주의를 분산시키는 편이 차라리 나았어요. 하지만 뭔가 구체적인 내용이 있는 걸 병행하면 강의를 놓치게 되니까 내용 없는 딴짓을 해야 하지요. 저는 필기를 하면 필기하느라 강의를 다 놓쳐버려서, 필기는 아주 중요하고 꼭 적어야 하는 내용일 때만 키워드 한두마디 정도 써놓고 나중에 기억을 되살려 보충하는 식으로 했어요(일부는 나중에 되살려지지 않지만 어쩔수 없지요ㅠ). 저는 주의를 분산시키기 위해서 옆에 낙서할 종이를 따로 두고 내용 없는 낙서를 하거나(내용이 있으면 절대 안됨), 예전에 테이프(동영상 강의는 안들어봤어요) 들을때는 뜨게질도 해봤어요. 뜨게질은 제가 걍 원래 취미로 하던거라 그렇고, 일반적으로는 피젯스피너나 주무르는 인형 같은거 추천해 드립니다. 아무튼 저랑 비슷한 문제를 겪는 분이 있다면, 아주아주 가볍게 주의를 분산시킬수 있으면서도 강의 듣는걸 방해하지 않을만한, 뇌를 쓰지 않는 적당한 딴짓을 찾아서 해 보세요. 좀 나아요.
시험공부를 하려면 자습도 많이 해야 하잖아요. 제가 공부한 과목들은 앞의 내용이 뒤에 나오고 뒤 내용이 앞에 나오는 와중에 전체적인 체계도 좀 알아야 하는데, 제가 특히 작업기억력이 많이 딸리고 외우는 것도 잘 못해서 방금 읽은것도 생각 안나고 다시 들춰봐야 할 정도예요. 그래서 저는 어떻게 했냐면, 시험이 좀 남아서 시간 여유가 있을때 기본서 1회독때, 그 책의 목차를 적어나갔어요. 지금 읽고있는 부분의 목차를 세부목차까지 목차가 바뀔때마다 전부 적어두었습니다. 같은 과목을 두번째 읽을때는 옆에 펼쳐두고 중요 내용을 메모하거나, 관련된 다른 목차를 펼쳐서 참조하거나 하며 활용했어요. '내가 지금 어디에 있다'라는 걸 확인하는 지도 같은 의미로 도움이 되었습니다. 제가 악필에 메모도 엉망으로 하는 편이라 적어둔 내용 자체는 그리 쓸데는 별로 없었던 것 같고, 그냥 적어서 모아두고 종종 참조한다는 행위 자체는 도움이 되었습니다. 사진은 그때 썼던 노트들을 쌓아 본 것이예요. 사실 되게 별거 아닌건데 몇년간 끼고 살았던 거라 정이 들어서 간직하고 있어요. 괜히 자랑하고 싶어서 옆에 크기비교용 아이폰도 놔 봤네요 ㅋㅋ 
사실 저는 문제를 많이 풀었던 것 같습니다. 몇년치 모의고사, 학원 모의고사, 이런걸 사다가 시험보듯이 시간을 정해놓고 붙들고 앉아서 풀면 그래도 그 시간동안은 앉아있더라구요. 승부욕이 생겨서 그런가, 내가 모르는 게 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점도 좋고요. 공부하는 분이라면 누구나 아시는 오답노트, 이건 저는 오답노트를 따로 쓰지 않고 틀린걸 기본서 해당 부분에 붙였어요. 그렇게 하면 그걸 또 틀렸을때 같은 자리에 전에 틀린게 붙어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내가 같은걸 몇번 틀렸는지 알수 있는거죠. 자괴감이 들긴 하지만 나름의 충격요법이 되어서, 그래도 똑같은걸 한 너댓번 틀리고 나면 그다음엔 생각이 나더군요.
그 외에 제가 많이 신경쓴 것 중 하나는 컨디션 관리였습니다. 저는 아프거나 피곤하면 거기 정신이 팔려서 다른 걸 아무것도 못하겠더라고요. 이얘긴 나중에 따로 쓸거지만, 아무튼 필요한 집중력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도 컨디션 관리가 중요하다는 얘기를 꼭 해드리고 싶어요.
찬바람이 불어오는 계절이 되니 괜시리 긴장감이 드네요. 겨울철은 시험이 다가오는 계절이잖아요, 이제는 시험을 안 보게 된지가 몇년이나 됐는데도 찬바람은 여전히 그런 기분을 불러오네요 ㅎㅎ
ADHD의 훼방에도 불구하고 노력하는 수험생 여러분을 응원합니다. 효율이 좀 떨어진다고 해서 잘못된 게 아니예요. 님들은 잘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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