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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이라는 재능
Level 8   조회수 373
2019-10-09 23:21:51

나는 노력이라는 걸 해본적이 없었다.

내 나름대로는 애를 쓴 것 같긴 한데, 다른 사람들의 노력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난 야자 끝나면 집에 가서는 그냥 잘 자는데 딴애들은 야자 끝나고 집에 가서 몇시간씩 공부를 더 한다고 하니까

나는 대학 졸업하고 전업으로 공부만 해도 하루에 3-4시간도 책상 앞에 붙어있기 어려운데 남들은 하루에 8시간씩 10시간씩 12시간씩 공부를 한다고 하니까 

나는 막판에 본다고 기억나는 것도 없고 졸리면 자야 하는데 남들은 밤새서 벼락치기 공부를 한다고 하니까

나는 암기는 도저히 못하겠는데 남들은 깜지를 쓰든 암기장을 들고 다니든 어떻게든 달달 외운다고 하니까

난 도저히 제시간에 집을 나설수가 없는데 남들은 집이 멀든 가깝든 날이 춥든 덥든 매일매일 출근시간에 맞춰 정시출근을 하니까

난 조금만 아파도 일거리에 눈이 안 가고 지지부진하는데 남들은 아프든 어떻든 심지어 병이 들고 쓰러지도록 아무튼 붙어앉아서 일을 하니까.


다른 사람들이 공부량으로 허세를 부리는게 아닐까? 의심하기도 하고 

노력이란 것도 재능이라 나는 가지지 못한 것이니 대신 내가 가진 뭔가 재능이 있겠지...스스로 위로해보기도 하고

나태하고 게으르고 목적의식 없는 인간이라고 자신을 비난하며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나는 열정이 없는 인간인가, 하고 싶다고 잘하고 싶다고 말만 앞섰지 간절함이 없는가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다. 


내가 이런 얘길 하면 다른 사람들은 내가 겸손떤다고 생각한다. 본의아니게 열심히 공부하고도 아닌척 하는 깍쟁이 우등생으로 보였던 것 같다. 진짜 안해서 안했다고 한건데. 

이번에 진단 받은 이야기를 주변에 한 이후로, 처음으로 친구들이 내 "노력없음"에 대한 이야기를 믿어주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지금까지는 안믿어줬다는 사실을 이번 기회를 통해 알게 되었다. 그렇게 재수없는 애로 보였는데도 나랑 놀아줬다니 내 친구들 대단해...


감사하게도 나는 약이 잘 듣고 부작용도 빠르게 적응되고 있지만, 

약으로 의지력과 주의력을 보충한다고 해도 지금까지의 나는 그대로 있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지는 않는다.

여전히 나는 내가 열정이 없는 인간인 것 같고 좀 나태하다고 생각하고 인생의 목표가 희미하고 그리고 또... 멈춰서 가만히 자신에 대해 생각해보면 그냥 다 잘 모르겠다. 늘 그랬듯이. 


요즘은 어릴때부터 지금까지 어떻게든 책상 앞에 붙어있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을 까먹지 않기 위해서 한동안 시도하다 중단하고 잘 안되고 또 자괴감에 빠지곤 했던 여러가지 수단들을 하나하나 떠올리고 있다. 그땐 좀 하다 중단하고 좌절하고 그랬지만 이제 약으로 보충한 의지력이 있으니, 나에게 맞는 생활의 체계를 만들고 좋은 습관을 만들어나가고 싶다. 

나의 노력 없음이 어디까지 천성이고 어디까지 병증인지 잘 모르겠고, 여전히 노력하는 재능은 내 것이 아닌 것 같지만, 앞으로 알아가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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