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걱정병이 도졌다. 내가 약을 잘못쓰고 있는건가? 불쑥불쑥 튀어드는 생각들. 약에 대한 내성이 무척 빨리 생기는것같기도 하고, 근 몇개월간 각성되었던 몸과 마음에서 용수철같은 관성이 조금씩 느껴져서일수도 있다. 그러나 결국 근본적인 원인은 내가 약을 먹는 동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나에게 있어서 다른 사람들은 늘 미지의 영역이었다. 그들이 주고 받는 미소를 나도 따라 지어보지만 사실 왜 이 타이밍에 그들이 미소를 짓는지 알수없다. 마치 너구리가 사람행세를 하는것처럼, 누군가가 하는 말을, 표정을 내것인양 영혼없이 따라하곤 했다. 그러나 결코 마음으로는 누군가와도 친해질수가 없었다.
사실 이건 그들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해서이거나, 대화 흐름을 놓치는 문제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면 전부,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다 들었다. 그러나 그 말이 왜 지금 이 맥락에서 나오는건지, 왜 이 상황에서 웃는것인지 늘 곱씹고 또 곱씹었다. 사실은 남들은 곱씹을 필요없이 감각으로 파악하는 것을, 나는 너무나도 둔한 감각때문에 이해할수가 없었던것이다.
내가 약으로 가장 크게 도움을 받는 부분은 이런 것이다. 나의 기억과(내가 기억했는지도 몰랐던.!), 맥락에 대한 감각과(마치 제3의 눈을 뜬 기분), 모든 사람들의 말과 반응과 사건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곡해하지 않는 깔끔하고 문제없는 머리속 상태. 슬퍼할 것에 슬퍼할 수 있고, 아무렇지도 않은 것에 아무렇지 않아할수있으며, 기뻐할 것에 기뻐할수 있는 능력.
누군가에게 경악스럽게 상처되는 말을 맥락을 모른채 해버리지 않을 수 있는 능력.
약을 먹으면 머리가 너무나 평온하다. 나에게만 집착하고 몰두하던 모습을 떠나서 남과 세상에 대한 객관적이고(?) 인간적인 흥미가 생긴다. 나를 병들게 했던 나에 대한 몰입이 여러군데로 분산되는 느낌이랄까.
아무리 공부를 하려해도 할수없고, 집중을 할 수 없는, 그런 문제는 내게 없었다. 그저 아무것에도 집중하고 싶지 않았던것같다. 지금 '나' 의 불안하고 안절부절한 내적상태 외에는.
그러니, 공부를 하던 안하던 일을 하던 안하던 사람답게 살기위해서는 약을 먹어야만 한다. 약을 먹지 않으면 또다시 사람 앞에 서는 것이 두려워지며, 불안한 너구리(?)로 돌아가게 된다.
일 안하는 날, 그냥 편하게 친구 만나 노는 날에는 약을 안먹어도 되지 않냐며 눈을 동그랗게뜨는 의사쌤한테 할말이 없다.
약을 안먹으면 편하게 친구 만나 노는 것이 안돼기 때문이다. 사람이 안돼기 때문이다..ㅎㅎㅎ... 단순히 기억력, 주의집중의 문제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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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 개인적인 글이긴한데, 저같은 분이 계시다면 평안(?)을 얻고자 씁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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