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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물 복용의 역설
Level 3   조회수 126
2023-11-20 22:34:57

제가 ADHD를 발견한 지 약 1년이 지났습니다.

긴 여정이었고 자신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다고 느낍니다.

갑자기 떠오른 아이디어가 있어, 사라지거나 귀찮음 때문에 기록하지 못하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 이렇게 글을 씁니다.


저는 적정 용량을 찾았고, 많은 변화를 겪었습니다.

집중력 문제, 불안이나 초조함 문제, 대인관계에서의 말실수나, 소비에서의 충동성 문제가 많이 개선되었습니다.

그리고 ADHD 일지를 꾸준히 쓰면서, 제가 어떤 생각과 감정을 갖고 무엇을 원하는지를 계속 추적해왔습니다.

그리고 이전과 달라진 긍정적인 제 변화는 문자 그대로 눈물이 날 정도였습니다.


그동안 저는 약물이 주는 강력한 각성 효과와, 평생 느껴보지 못한 심리적 평온감에 감탄하여, 긍정적으로 변한 부분에만 집중했었습니다.

그리고 너무 오랫동안 고통을 겪었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주는 보상처럼 그 안식감을 계속 누리고 싶었습니다. 그냥 계속 쉬고 싶었습니다.

퇴직하여 직업이 없는 상태였지만 그래도 괜찮았습니다. 이 정도의 정신적 평온감은 모든 걸 초월해서 가장 최상단에 위치하는 중요한 가치였으니까요.


하지만 약물 복용이 1년이 넘은 지금, 저는 중요한 깨달음을 하나 얻었습니다.

그건 바로 약물 복용으로 생겨난 긍정적인 변화에는 역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평온하기 때문에, 굳이 뭔가 노력하고 싶은 마음이 강렬하진 않습니다. 

머리로는 알아도 그게 마음으로 동기부여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동안 세상은 너무나 가혹했고, 저는 그 모든 시련을 뚫고 치료라는 보상에 도달했기 때문입니다.

움직이고 뭔가를 성취하고, 계속 발전해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몸이 움직여지지가 않습니다.


그냥 끝없이 평온하고 정신적 고요감에 취해서, 비유하자면 검푸른 밤하늘에 선명하게 뜬 초승달 아래 호숫가에서 혼자 조용히 쉬는 느낌입니다.

이제 움직여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끝없이 휴식에 파고듭니다. 

한 번 더 비유하자면, 2000년대 영화 '해리포터'에 1-2편에 나오는 마법의 거울에서 해리가 계속 부모님을 볼 수 있는 그 거울을 붙잡고 하루종일 바라보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가만히 있으면 현실이 서서히 망가지기 시작합니다.

마약성 약물은 이래서 위험한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역설이 발생합니다.

오랫동안 고통받았던 질병에 대한 극적인 치료를 경험했지만, 반대로 그 때문에 불안이나 공포에 의한 동기부여가 사라졌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동기부여란, 당장 움직이지 않으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그 동물적 공포감에 기반한 반사적 행동력과 추진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발전이란 대개, 하던 것을 계속 반복하는 데서 오기보다는, 새로운 패턴을 학습하고 기존에 부족했던 부분들을 보완하거나 채워넣을 때 이루어지는 과정입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저는 현실에 안주하고 있었습니다. (약에 의존한 것은 아니지만, 너무 긴 세월 겪은 정신적 고통 때문에 무한한 휴식을 갈구했습니다.)

이런 모습을 고려하면, 긍정적인 변화는 물론 스스로 칭찬해주고 격려해줌이 마땅하지만, 거기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움직일 힘이 생겼다면, 의식적으로 문제점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발전이 시작되는 듯합니다.


이제 약물로 인해 변화한 긍정적인 모습은 당연해졌습니다.

그러니 계속 이 부분에만 천착해서 안주하면 안 됩니다.

움직이고 걷고 새로운 곳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스스로가 만든 끝없는 휴식의 방에서 벗어나, 잔인한 현실의 땅에 발을 딛고 앞을 똑바로 바라보고 나아갈 것입니다.

혹시 약물로 인해 너무나도 충격적인 긍정적 변화를 겪으신 @분들이라면, 한 번쯤은 이런 역설을 생각해보는 것도 스스로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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