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에 글을 썼던 것이 3월이었으니 삼 개월 만이네요. 그때 썼던 글을 보니 참 어수선하고 정신없습니다. 그리고 그 때 제가 주로 느끼던 변화들에 대해 단서를 알 수 있는 표현이 있네그렇지만 제가 아요. 그 변화나 깨달음에 대해 글로 쓰고 싶었는데 귀찮아서 마음 속에만 담아 두고 말았었네요. 지금 생각해 보면 글은 그 시대의 산물이라 구체적 언어로 남기지 않으면 휘발되기 쉬운 것 같습니다. 그 생각들이 지금도 내 안에 남아 있겠지만, 자세하고 명료한 정도는 조금 다른 것 같아요. 그때그때 써 둘걸 싶어요.
그동안 저에게는 놀라운 변화가 있었습니다. 저는 아마도 기억이 있던 때부터 늘 가슴 속에 쓸쓸함을 안고 살았지요. 잃은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무엇인가 그리워했습니다. 조용한 밤에 눈을 떠 혼자 깨어 있을 때 수런거리는 감정들은 저를 늘 길을 잃게 만들었었죠. 혹은 채워지지 않는 허기 혹은 갈망의 원인이 어디로부터 비롯되었는지 알 길도 없는 채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이런 감정이나 느낌의 원인이 무엇인지 찾고자 수많은 자아성찰과 상담심리 책, 연구들을 살펴보았지만 뾰족한 수는 없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도움이 되기도 했지만 지금 살펴본다면 그러한 책들에 있는 이야기들은 다른 사람이 자신의 삶 속에서 발견한 하나의 방법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말이었습니다. 물론 제가 그 책의 저자에 깊이 이입해서 어떤 생각의 흐름을 겪어 왔는지 대리 체험한다면 저도 조금은 깨달음에 가까워질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제가 알게 된 것은 결국 사람은 다른 사람의 길을 걸을 수 없으며 깨달음이나 진리 혹은 구원이라는 것은 누군가가 주거나 전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안에서 스스로의 경험과 판단, 행동으로 그것을 실제로 체험했을 때에만 그것을 정말 깨달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깊은 결론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배움이나 독서, 선생이나 강의가 필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닙니다. 인간의 삶은 제각기 다르고 환경이나 마음, 상황이 모두 다르기에 똑같이 적용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히 많지만 어떤 면에서는 또 비슷한 사회의 모양을 겪기도 하기 때문에 자신이 개인적으로 체험하는, 자신의 몸과 정신으로 그 한계 안에서 시험하고 대결하며 실패하고 다시 일어서는 그 과정들은 그 마음의 모험은 어떤 면에서는 비슷할 수도 있습니다. 마치 이야기의 원형이 있는 것처럼요. 물론 사람마다 이야기가 다 같으라는 법은 당연히 없으므로, 남이 좋은 마음으로 혹은 돈을 받고 가르침을 주고자 하는 그런 것들을 충분히 자신의 안에서 검증하고 시험해 보십시오. 물론 그럴 가치가 있는 것에 한해서입니다. 저는 인간은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모든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여야만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약간 멀리 갔는데, 어쨌거나 저는 근 평생을 따라온 우울의 그림자에서 반 이상 비껴났습니다. 이것은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을까요? 이전과 이후를 대조한다면 달라진 요소들을 찾을 수 있을 것 같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모든 것을 검증하기에는 달라진 것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약을 계속 먹기도 했지요. 늘 모자라던 도파민 수치가 음, 약 일 년 조금 안되게 평균량이 상승했으니 그 지속된 변화의 결과일 수도 있겠습니다. 도파민의 부족이 우울을 가져오기도 한다고 하니까요. 어쨌거나 약을 먹음으로서 생각에서 실행까지의 지연이 이전에 비해 상당히 단축되었고 그것이 저에게 긍정적 피드백을 주었을 수도 있습니다. 당연하지만 약이 의지를 극복해 주지는 못합니다. 지금도 하기 싫으면 누워 있지만 이전과는 다르게 비참한 채로 누워있지 않습니다. 내가 다 할 수 없는 혹은 지연된 과제의 산에 짓눌려 쉬지도 못하고 포기하지도 못하며 실행하지도 못하는 심리적 늪, 덫에 걸린 채 피만 흘리는 시간이 상당히 줄었습니다. 대체 그 죄책감이 왜 사라졌을까요? 물론 우리 코로나의 영향으로 저의 일이 줄어서 과중한 업무가 있지 않아서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비교한다면 이전에는 죄책감과 불안 속에서 지냈습니다. 확실한 것은 무언가 달라졌다는 결과입니다. 가장 혁신적인 것은 자기자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 늪에 빠진 시간처럼 외부의 일정이나 판단 기준에 맞지 않는 스스로를 자책하고 실패감에 젖어있는 시간이 사라졌습니다. 왜냐면 지금 당장 하지 않아도 결국은 할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지 못한다면 저는 대가를 치르겠지만, 그렇대도 그것은 당연한 일이지 비참할 일은 아닙니다. 왜냐면 안했으니까 그렇게 될 뿐이니까요. 글로 써 두니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데, 문제가 있는 기간에는 저렇게 되지 않습니다. 하나의 작은 일정이 어그러지면 그때부터 식은땀이 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 일정 시간에 첫번째 것을 잡고 있다가 두번째 것이 밀리고, 그것을 아무렇지 않은 척 하려다 결국 다른 것까지 실패하고 맙니다. 이런! 모든 것을 망쳐 버렸어요. 실패한 인간. 역시 그러게 처음부터 똑바로 했어야 했는데 그럴 리가 없죠. 라는 웃기는 자책의 늪에 빠져 오히려 그 다음 발걸음을 짓누릅니다. 사실 그렇게 실패감과 죄책감을 느낀다고 아무도 용서해 주거나 옳은 행동을 했다고 인정해 주지도 않는데 스스로에게 벌을 주는 마음의 감옥에 갇히고 말죠. 그냥 이런 것들이 어느순간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못하면 못한 것이죠. 나는 할려면 할 수 있습니다. 앞서 못한 하나를 메꾸기 위해 두 배로 과도한 퍼포먼스를 보일 필요도 없고 (물론 그렇게 한다면야 좋겠지만 그걸 못한다고 욕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쨌거나 할 수 있는 걸 하면 그만인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알아낸 결론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같은 결론이 있을 필요도 없고 같을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동안 다른 사람의, 때로는 이해할 수 없고 나에게 고통을 주는 행동까지를 전부 바라보았습니다. 저러다 망하겠지 한 사람도 딱히 망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내가 생각한 바람직한 방향으로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면에서는 망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되지 않았다고 인생이 불행하느냐 하면, 꼭 그렇게 볼 수만은 없었습니다. 자신의 살길을 찾아 그 안에서 재미를 찾고 있었습니다. 혹은 자신이 옳고 대단하므로 남들을 좀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식의 사람도 지켜보았습니다. 스스로를 옳다고 여기는 것과 별개로 잘못된 부분을 볼 수 있었습니다. 결국 처음의 화려함과 달리 몰락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인생은 길기 때문에 지금의 주저앉음이 끝은 아니겠지만 당분간은 힘들겠지요. 이들의 공통점은 결국 남이 뭐라건 자기 하고싶은대로 했고 그 결과 망하건 말건 잘되건 엎어지건 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남의 말을 들어가며 산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들도 행복하거나 적당히 불행하지만 내가 모르는 기쁨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결국 세상에 있는 좋은말이나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하는 말들은 들어서 나쁠 것은 없겠지만 그것들은 내가 아닌 사람들의 삶의 흔적입니다. 내 한계와 능력 안에서 그것이 어떻게 소화되는가는 다른 문제입니다. 아마도 저에게는 그런 시간이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갑자기 너무 이상한 말을, 그것도 추상적인, 많이 해 버렸는데 아마 저를 오래 우울하게 한 이유 중 하나가 @에서 비롯된 실행의 느림이 저를 너무 외부의 컨트롤에 내맡기게 되는 결과를 낳은 것, 그것 때문에 나 자신의 힘 안에서 스스로를 시험하고 움직이기보다 외부의 기준에 맞는가 아닌가만을 생각하게 만든 일들이 결국 나 자신을 도구처럼 취급하게 했고 우울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만들어졌다는 암묵적 결론입니다. 어쨌건 인생은 자신의 것이지요. 그러니 마음대로 해 보십시오. 물론 이 말이 마음대로 한다고 다 성공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정신과 진료를 고민하는 분이 많더군요. 부모님이 반대한다고요? 부모님은 당신이 정신과에 가서 행복을 찾을지도 모른다는 점에는 관심이 사실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냥 자기 생각만을 말할 뿐입니다. 이런 말이 기분나쁘거나 극단적으로 들릴지도 모르죠. 마음에 안 드시면 넘어가면 그만입니다. 뭐가 어떻게 되었건 결국 자기 인생을 행복하고 즐겁게 꾸려가는 것은 스스로에게 충실할 때입니다. 흔한 말이지만 그렇습니다. 물론 이렇게 뭐 대단한 것을 말하는 양 해도 우연히도 날씨가 너무 좋아서, 약이 좀 받아서 이렇게 된 것인지도 모르고 계절성 조증이 찾아온 것인지도 모릅니다. 만약 그렇다면 또 어떻습니까? 지금 저는 자유를 느낍니다. 이것은 사실이므로 지금의 내게 충실한 기록을 남깁니다. 힘들어진다면 그때의 생각이 있겠지요. 그러면 또 그때에도 글을 쓸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분명한 것은, 행복을 나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행복의 순간은 너무도 짧고 우울은 영원할 것처럼 찾아오지만 그 터널 안에서 기억하기 위해 써 둡니다.
+)혹시지만 도용 및 전재/글의 내용을 변형하거나 마음대로 사용하지 말아 주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