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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문제의 이름은
Level 8   조회수 208
2020-07-12 23:00:23

나에게는 분명히 뭔가 문제가 있었다. 


무난히 학교를 다녔고, 성적도 그만하면 잘 나왔고, 별일없이 다음 단계의 학교로 진학하고, 남들보다 조금 오래 걸리긴 했지만 어쨌든 썩 만족스럽지는 않아도 대충 다닐만은 한 회사에 취업을 하고, 적당히 농땡이도 치고 때때로 보람도 느끼며 일을 하고, 많은 장점과 여러 단점들을 가지고 있지만 성품이 좋은 사람들과 그럭저럭 괜찮은 연애를 하고 또 헤어지고 하다 그 중 한명과 결혼을 하고, 부부란 으레 그렇듯 부침과 기복이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사이좋게 지내고, 많지는 않아도 몇명 정도는 오래된 친한 친구가 있고, 그러니까 한마디로 요약하면 분명히 잘 살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분명히 뭔가 문제가 있었다. 


나에게는 분명히 뭔가 문제가 있었다. 나에게 뭔가 문제가 있지 않았다면, 그렇게까지 숙제를 잊어버리고, 크고 작은 말실수를 하고, 해야 할 일들을 이유 없이 또는 온갖 핑계를 다 동원해가며 미루고, 끈질기게 지각을 했을리가 없었다. 


남들과 다르게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는 내가 그다지 개의치 않았고, 운이 좋았는지 따돌림이나 괴롭힘은 피할 수 있었다. 남들이 해내는 정도의 성취는 나도 할 수 있었고 해냈기 때문에, 그저 좀 유별나고 특이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보통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에게는 분명히 문제가 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그것을 외면할 수 없었다. 


나에게는 분명히 뭔가 문제가 있었으므로, 나는 그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다이어리를 내 몸처럼 들고 다니고, 할 일 리스트를 만들고, 장기 목표와 단기 목표를 만들고, 그것을 지키지 못하고, 자책하고, 괴로워했다. 

말을 신중하게 하자고 결심하기도 하고, 말수를 줄여보려 노력하기도 하고, 다시 결심하고, 다짐하고, 또 실수하고, 자책했다. 

시계를 조금 빠르게 돌리기도 하고, 알람을 몇개씩 맞춰보기도 하고, 좀 과하다 싶게 일찍 일어나보기도 하고, 그리고 계속 지각을 했다. 

어쩌면 나는 자신에게 너무 많은 기대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니까 조금쯤 내려놓고 자신을 용서해보기도 하고, 하지만 기준을 낮춰봐도 이건 너무 심한 것 같아서 다시 자책하고 괴로워했다. 


나에게는 분명히 뭔가 문제가 있었지만, 나는 그 문제의 이름을 몰랐다. 

문제의 이름은 때때로 게으름이라고, 의지박약이라고, 머리가 나쁜 것이라고, 열정이 없는 것이라고 느껴졌지만, 그 모든 것이 답인 듯 하다가도 답이 아닌 듯 했다. 


나에게는 분명히 뭔가 문제가 있었고, 그 문제의 이름은 ADHD였다. 


문제의 이름을 알게 된 후 약을 먹기 시작하고, 약을 늘리고 줄이고 바꾸고 조정하면서 어떤 것들은 나아졌고 어떤 것들은 여전하지만, 문제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그 자체로 기쁜 일이다. 문제의 이름을 알고 나서 해결할 수 있는 희망이 보였기에, 문제의 이름을 알고나자 같은 문제를 가진 사람을 알아볼 수 있었기에, 문제의 이름을 알았으므로 자책하는 대신 자신에게 설명할 수 있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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