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을 제 시간에 눈뜨자마자 잘 챙겨먹어서인지 지난 주에 병원가서 엉망을 고백해버리고 홀가분해져서인지 일단 우울에 처져 완전히 망쳤다 싶은 버린 날은 없었다
쌤의 말은 늘 그렇듯 매우 간단명료하고 옳지만 나도 알지만 받아들이긴 힘든 그런 말이다 다행히 약은 나를 좀 더 무감정하게 만들어줘서 그 받아들이기 힘든 감정도 약하게 해준다
약을 먹어서야 처지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끄덕이고 그래 맞아 하고 다음 단계에 나아갈 힘을 주는 것이다
특히 이번주는 주중에 교육 수료하면서 여기저기 원서를 내고 거기에 따른 면접 자격증 시험도 두개 막판에 몰렸고 생각도 안해본 직종, 싫어서 퇴사한 전업종에서도 면접요청이 와서 결정을 되게 많이 해야 했던 한 주였다
예전같으면 뭐부터 할지몰라서 고민만 하다 생각은 생각에 꼬리를 물고 뭘 할라치면 수반되는 잡다구리한 일상의 허들에 이리저리 걸려서 또 흐지부지 포기만 해버렸을텐데
약을 먹으면 그런 너무나 경계없이 섞인 것 같은 생각뭉치가 거의 사라지고 한번에 한 생각씩 하게 되어서 좋다 우울한 감정이 사라져서 생각이 꼬리를 물고 결국 골짜기에 빠지지 않는건지 아니면 먼저 생각이 정리되어서 우울함이란 감정이 들지않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번주는 평온해서 좋았다 노트에 할 일들을 적어놓고 체크리스트란것도 거의 처음으로 제대로 해봤고 중요한 정보들 전화번호 날짜 필요한 서류 질문해야 할 것 등등도 미리 적어놓고 뭔가 차분히 붕뜨지 않고 시간을 보냈다
이 정도면 알차게 지낸 듯 싶다 며칠 전만해도 빨래를 미뤄 당장 입을 속옷이 없어서 쿠팡 새벽배송 시켜야해서 자괴감이 엄청들었는데.. 병원갔다와서 한숨 잔 다음 방에 쌓인 쓰레기부터 갖다 내놓고 일단 급한대로나마 옷도 박스안에 상해가는 냉장고 안 식재료는 다 먹어치웠다
지난 번 진료 때 쌤의 조언은 내가 실수 하거나 스스로 자책하게 될 때 친구가 이런 행동을 한다면 내가 그렇게 비판할 정도일까? 생각해보라 하셨다
약빨이 잘 받고있는 것인지 그냥 그런 자기 비판적인 생각까지 아예 안간다 언젠가부터 이게 감정이 폭이 좁아진 느낌 이번 주 지금 이 순간 평온하고 안심이 되는데 조금 마음에 걸리기도 한다 감정이 강렬할 때는 뭔가 쓰고 표현하는 게 날카롭고 각이 서있었는데 이제 약먹고 감정이 사이다 거품빠진 것 마냥 사라지니 내가 조금씩 무감동해지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래도 전직 때문에인지 스토리텔링 컨텐츠같은 직종에서 취직 연락이 갑자기 오는 중인데 감정 폭이 좁아져버리면 그 쪽 업계에는 치명적인데.
예전 내 뇌 속이 36색 크래파스를 아무렇게나 칠한 모양이라면 차분해진 나는 블랙 화이트 그레이 같은 무채색 느낌이다. 몸과 뇌의 주인인 나는 지금의 그런 평온이 간절하고 너무 좋으면서도 약간 낯설다
아, 이번 주 막판에 대형실수를 하나 하긴했다 또 혼자 몸개그 하다가 코뼈가 금 가버렸다 그치만 이것 역시 이제 담담하다 뭐 코 하나 비뚫어진다해서 죽는 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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