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2.05 새벽에페니드 조회수 32 2018-02-05 18:54:01 |
#1. 한동안 글을 쓰지 않았다. 컴퓨터 화면이 영 불안정했던 탓에 켜기가 겁이 났던 것이다. 핸드폰으로 글을 쓰는 데 익숙하지가 않았고, 갑자기 분홍빛으로 물들거나, 검은 스크래치가 팍! 팍! 가는 화면으로 글을 쓰기에는 두려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최근에 너무 공부가 잘 됐다. 콘서타가 잘 맞았다.
#2. 약을 먹으면 어떤 느낌이 드는지에 대해서 잠깐 써 보고 싶다. 처음에는 아예 빈속에 먹어도 아무 느낌이 없었다. 18mg은 물론이거니와 36mg조차 그랬다.
#3. 지금은 몸이 약을 거부한다. 식욕이 약간 줄어 하루에 두 끼만 먹어도 괜찮고, 화장실을 잘 간다. 처음에는 고양감이 높았지만 지금은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감정이 마르는 느낌이다. '처음만큼의 효과를 느끼지는 못하는 시기'가 찾아온 것일까. 글쎄, 회의적이다. 맨 처음 콘서타를 먹었던 2012년 말을 떠올려보자.
#4. 나는 군 병원에 있었다. 하루에 하는 일이라고는 먹거나 씻거나 하는 일 말고는 청소시간에 청소를 하거나, 글을 쓰는 게 고작이었다. 나는 약효를 실감하지 못했다. 약이 효과가 없었기 때문에 스스로가 ADHD냐 어떠냐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있었다. 살면서 그때만큼 소설이 잘 써진 적은 없었지만,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그게 약효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여기가, 이 정신병원이 글을 쓰기에 적합한 환경인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자해의 위험 때문에 샤프는 쓰지 못했고, 끝이 뭉툭한 플러스펜이 고작이었지만 그걸로 어찌나, 지우지도 않고 글이 죽죽 써졌는지.
#4, 그리고 다시 약을 먹기 시작한 2018년 1월 중순을 떠올려보자. 역사의 년도가 죽죽 외워지기 시작한 것은 약을 복용하면서부터였다. 살면서 지금만큼 암기가 잘 된 적이 없다. 초기의 나는 그것에 대해서 고양감을 느꼈다. 지금은? 지금은 너무도 당연하다. 오히려 한 번 봤는데 왜 기억을 못하지? 하고 스스로에게 화를 내기도 한다. 회퇴변적소 1611이나 칠서의 옥 1613이나 병신처분 1716 같은 것들. 사실상 문제를 극악으로 더럽게 내지 않는 이상 시험 성적으로 이어지지는 않을 자질구레한 디테일들. 이런 거 내면 시험 감독관들 욕 먹어도 싸다. (그런데 꼭 이런 게 한 문제씩...)
#5. 그렇다. 약효는 있다. 약을 먹고 10분여가 지나면 앞머리가 꽉꽉 조여드는 게 느껴질 정도다. 약효가 있고 없고가 문제가 아니라, 지금 문제는 약효로 인한 감정의 기복이다.
#6. 처음에는 고양감이 느껴졌는데 지금은 아니라고 위의 나는 기술했다. 좀 더 자세히 쓰자면, 지금은 고양감이 아니라 다소의 우울감이 느껴진다.(아직까지는 딸기잼, 땅콩잼, 유자잼으로 상쇄가 가능하다.) 다만 이게 약효인지, 수험생의 우울감인지가 불분명하다. #4에서 나는 왜 한번에 외우질 못하냐고 스스로에게 화를 내고 있다고 기술했다. 수험 생활 자체에서 오는 초조함에, 처음 느꼈던 기능 향상을 지금은 다만 '체감'하지 못한다는 것이 더해져서 지금의 시퍼런 상태를 만들고 있을 수 있다.
#7. 약을 중심으로 생활을 관찰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오류 중 하나는 모든 현상을 약을 중심으로 관찰한다는 데 있다.(와! 총각은 결혼하지 않은 남자다!) 그러나 그 모든 원인일 수 있는 것들(이번 주도 그 사람과 이야기를 별로 하지 못했다던가)을 고찰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므로(또 화면이 파직거린다.) 나는 다만 딸기잼 땅콩잼, 유자잼 말고도 나를 즐겁게 해 줄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 생각해봐야겠다. 그 뭐야, 요새는 좀 유식한 단어로 이렇게 부르더라. '퀘렌시아'.
#8. 무엇이 나를 재충전시켜줄 수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