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읽으시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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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과거 2, 2013년 첫 발령기, 2014년 2013년 3월 나는 첫 발령이 났다. 정신없었던 3월이 가고, 4월부터 우리반은 교실 붕괴의 전조증상에 봉착했다. 그 땐 잘 몰랐지만 학급 아이들에게 적합하게 대응하여 생활지도를 하고, 학급 운영을 스케줄대로 운영하는 것을 못했기 때문이었다. 학급운영및 수업 뿐 아니라 업무도 당연히 엉망이었다. 실수가 많은 정도가 아니라 모든 것이 순서가 없었고 업무나 학교 생활의 기본 루틴이 없었다. 약속을 잊거나 할 일을 제 때 못하는 건 기본이고 내 실수를 다른 사람들이 메꿔주는 경우가 빈발했다. 당연히 교직원들 사이에서도 평판은 좋지 않았다. 2013년 5월 이후부터 우리반은 교실 붕괴 현상을 일으켰다. 학군이 어렵고 2012년에 있었던 일들로 노하우가 있는 교사가 맡을 필요가 있는 아이들이었는데 다른 신규교사들보다 태생적으로 부족할 수 밖에 없는 내가 학급을 맡았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학급에 규칙을 세우지 못하다보니 아이들은 하나서부터 열까지 내 말을 듣지 않았고 지친 나는 감정적인 반응을 많이 보였다. 그럴수록 아이들의 반발은 매우 심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전두엽이 아직 덜 성장한 아이들이 온화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담임이 학급에서 중심을 굳건히 잡아줘야 하는데 나도 전두엽이 다른 선생들보다 덜 성숙했으니......교실에서 질서, 존중, 배려, 상호이해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법칙이 지배하는 정글같은 분위기였다. 나는 아이들의 동시다발적인 무질서에 적합하게 대응하는 게 너무 어려웠다. 점차 학급 아이들 앞에 서면 숨이 꽉막히고 창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은 심정에 이르렀다. 엄마는 매일 내가 학교가는 모습이 도살장에 소가 끌려가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학교가는 것의 공포는 초등학생이 홀로 운전해서 시골서 부터 서울 중심부의 복잡한 곳까지 억지로 가야하는 상황처럼 몹시 불안했다. 왜 이런 비유를 들었냐면, 사회 생활에서는 예측불가능한 것들을 동시다발적으로 빠르게 대응해야 하는 실행기능(executive function)이 중요하다. 실행기능이 필요한 대표적인 상황은 운전을 할 때가 있다. 나는 지금도 adhd가 없는 다른 동년배 교사들에 비해서 과업을 균형 있게 수행하지 못한다. 10년 가까이 경력이 되지만 여러가지를 전반적으로 균형 있게 실행하는 수준은 2년차 교사정도가 되는 것 같다. 약을 먹고 최대한 노력을 해보지만 처리 속도라던지 처리하는 업무의 양이나 대인관계 등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점을 기준으로 본다면, 30대 중반인데 20대 초중반 수준의 선생님들과 비슷한 느낌이다. 지금도 10년정도 느린 느낌인데, 약을 먹지 않은 신규때는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신규는 다 힘들지만 내가 부적응하는 정도는 다른 사람들과 확실히 달랐다. 2014년 바뀐 학급에서도 어려움을 겪자 나는 정신적으로 극도로 불안함을 느꼈고 2014년 10개월간 적응장애로 병휴직을 쓰게 되었다. 휴직기간동안에 난 참 방황했다. 사춘기가 뒤늦게 온 것처럼 말이다. 내게 20대는 보이지 않는 부적응과 외로움이 혼합된 늪과도 같은 시절이었는데, 선생이 되면서 부적응이 눈으로 드러나기 시작하더니 눈덩이처럼 점점 거대해져서 내 삶 전체를 압도하게 된 것이다. 그 정점에서 나는 스스로를 참 사랑하기 어려웠다. 또한 내 자신의 어려움을 이해할 수도 없었다. 그토록 괴로웠으니 가족들과도 사이가 나빠졌다. 불안과 애정결핍에 시달리는 나는 남자친구가 없으면 하루도 살 수 없을 정도로 애인에게 의존했다. 그런 불안 속에서 나는 짧고 불안정한 연애를 이어갔다. 그러면서도 마음은 공허하고 지독하게 불안했다. 2015년에 복직을 하려면 진단서가 필요했다. 당시에 진단받은 불안과 우울이 혼합된 적응장애가 완치되었다는 진단서가 필요하다는 교감선생의 말을 삼성서울병원 의사에게 말했다. 그러니 그들은 다양한 심리검사를 했다. 나는 복직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해 검사에 임했다. #다시 과거 :2015년 1월의 어느 오후. 삼성서울병원의 외래 진료실 복직을 위해 진단서를 받으러 간 2015년 1월. 나는 의사에게서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의사는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ADHD 진료를 받아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NC 신경증 종합검사에 따르면 주의력 검사 상 초점 주의력, 작동 기억, 지속적 주의력, 선택적 주의에서 주의 집중력 문제를 배제할 수 없다는 결과가 나왔다는 것이다. 나는 결정을 내리기가 어려워서 의사에게 물었다. "저한테 이 치료가 필요할까요?" 의사는 간곡하게 말했다. 필요할 거라고, 본인이 환자라면 치료 받을거라고. 그러면서 의사는 내가 지난 진료에 말 없이 내원하지 않았던 일이 있었는데 그것도 이제 이해가 될것 같다고 했다. 나는 짧게 생각하다가 진료받기로 결정을 내렸다. 나는 콘서타오로스 서방정 27mg을 받아 집으로 돌아왔다. #3. 2015년: 복직과 약물복용 1년차 사회공포증이 있는 상태에서 다시 학교로 돌아가는 것은 어려웠다. 또 다시 적응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복직 전부터 계속 들었었다. 하지만 더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는 생각에 굳은 마음을 먹고 학교로 돌아갔다. 다시 교단에 섰던 2015년 3월 2일의 그 불안함과 묘한 두근거림이 아직도 어렴풋하게 기억이 난다. 아이들은 2학년 티가 덜 벗어난 3학년 아이들이었다. 올망졸망 모여있는 앳된 얼굴이 귀여웠지만 나는 자신감이 없었다. '얘들이 내 미숙함을 느끼고 마음대로 행동하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휴직 전 학교의 아이들은 내가 최악의 선생이라고 하거나, 또는 내가 하나도 무섭지 않다고 말했었다. 나는 불편한 검은 색 정장 속에 나를 가두고 카리스마 있는 교사인 척 애들 앞에 서 있었으나 머리 속은 새하얬다. 그때, 교실 맨 앞 2분단에 앉아있던 수호(가명)가 짝궁 시우(가명)에게 화를 냈다. "왜 자꾸 만져!" 수호의 로봇모양 필통을 시우가 자꾸 가져가는 것이었다. 시우는 수호가 낸 화에 찔끔하였지만 다시 필통을 만졌고 나는 중재에 나섰다. 내 훈육에 시우는 엄지손가락을 빨며 가만히 있었다. 수호가 투덜대며 말했다. "넌 유치원생 같아!"
삼월 첫날 전학 온 시우는 특수교육대상자였다. 그 아이는 자폐성 장애를 가지고 있는 아이였다. 시우의 행동에 대해 시우의 어머니와 다른 어머니가 싸운 뒤 전학을 온 것이다. 그 아이가 우리 반에 전학 왔을 때 교감 선생님이 지나가듯 말했었다. "하필이면, 달팽이 반에......." 말하자면 담임인 나도 적응을 못해서 위태위태한 반인데, 신경쓸 게 많은 아이가 내 반에 왔으니 학급이 제대로 운영될 지 의구심을 표했던 것이다. 나는 시우가 수호의 필통을 더 만지자 시우의 자리를 다른 아이 옆으로 옮겼다. 그 자리에서도 시우는 짝궁의 물건 중 특이하게 생긴 것을 허락 없이 여러 번 만졌다. 그 짝궁도 참지 못하고 시우에게 화를 냈고, 나는 시우에게 허락 없이 만지면 안 된다는 훈육을 하였으나 효과적이지 않았다. 나는 시우의 책상을 내 자리 근처로 옮겼다. 옮긴 자리에서도 시우는 두 눈을 내려 뜨고 엄지 손가락을 빨았다. 3월의 담임 업무에 치여 정신 없으면서도 나는 생각했다. '올해는 정말 달라져야만 해.' 교실붕괴가 오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이었는데 마음 같지 않았다.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도 딱딱하고 어색했다. 콘서타는 먹긴 했지만 효과와 필요성을 잘 못 느꼈던 시절이었다. 여전히 나는 너무나 서투르게 일하고 어색했다. 교감 선생님이 불퉁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째 달팽이는 신규교사들보다 못하나......"그 비교는 비수가 되어 나를 찔렀다.
학교에 아직 적응을 못 하는 상황과 사회공포증으로 나는 매순간 불안했다.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지만 자연스럽게 있으면 모든 것이 어긋났기 때문에 점차 강박이 생겼다. 누군가가 내게 말을 걸면 깜짝 놀랄 때가 많았다. 내가 또 실수했다는 말을 할 것 같았다. 실수가 누적이 되고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또 적응을 못 할 것 같았다. 콘서타도 신경성과 불안을 제법 높이는 작용을 했을텐데 그땐 그걸 몰랐다. 업무차 교실에 전화가 걸려오면 내가 또 잘못했다고 채근하는 전화처럼 느껴졌다. 아이들도 점차 질서없이 떠들고 장난치며 학급은 점차 소란스러워져 갔다. 나는 소음 속에서 전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교무선생님께서 내게 말했다. 정말 간단하고 사무적인 말이었다. "나이스- 학적에서 3월 출결마감 해주세요." 별것도 아닌데 엄청나게 불안하고 머리가 아팠다. 부끄럽게도 나는 몹시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교무 선생님은 당황하고 불쾌해했다.
학급 운영 외 내가 맡은 업무는 간단한 업무였다. 그런데도 나는 어떻게 처리할 지 순서가 떠오르지 않았고 애들이 하교하고 나서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업무처리 지연으로 동료들이 불편을 겪었고 나는 약간의 눈총을 받았다. 나를 도와주겠다는 어떤 선생님의 친절한 제안을 받았음에도 기분이 너무 비참했다. 숨이 너무나 가빠왔다. 화장실에서 혼자 울다가 겨우 교실로 들어갔다. 꾸역꾸역 수업을 이어가는데 시우가 교실 뒤에서 한껏 까치발을 하고 애를 쓰는 모습이 보였다. 수업시간에 교실 무단이탈을 방지하기 위해서 화장실을 가려면 안내문이 쓰여져있는 명찰을 패용하도록 했는데, 그 명찰이 시우에게는 높게 걸려있었던 거다. 다른 사람이라면 의자를 가져오거나 선생님이나 친구에게 말해서 명찰을 빼냈을 건데 그 아이는 다른 사람들이 주목할때까지 혼자서 계속 명찰을 빼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늦게 발견한 것이 미안할 지경이었다. 아이를 화장실에 보내고 나서 생각했다. '저 아이도 세상에 적응하는게 어렵다. 다른 사람이라면 다르게 했을텐데 자기만의 방식으로 애를 쓰고 있다. 남들과 섞이기도 쉽지 않다........나와 비슷하다.' 나는 시우에게 애틋함을 느꼈다. 나는 교실에서 불안함과 외로움을 느꼈는데, 시우를 생각하자 혼자가 아니라는 마음이 들었다. 아이들이 하교하고 난 뒤 나는 시우와 1:1로 이야기했다. 아니 하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시우는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고 다른 곳을 바라봤다. 통통한 두 뺨과 쌍꺼풀이 예쁘게 진 두눈을 가진 시우는 투명하고 맑은 눈빛으로 교탁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우와 눈을 마주하고 싶었다. 나는 손을 오페라용 쌍안경처럼 만들어서 시우의 눈에 가져다 댔다. 그리곤 "망원경"이라고 말하면서 내 두 손 안에서 동공 지진을 일으키고 있는 시우의 눈을 바라봤다. 나는 그 아이가 사랑스럽다는 것을 너무 늦게 알아버렸다. 담임이 시우의 팬이 되자 낯설음을 느끼던 우리 반 아이들도 점차 시우에게 애정을 느꼈다. 모두들 그 아이의 순수함과 귀여움에 반한 것이다. 4월에 장애이해교육 주간이 있었다. 그때 학급 아이가 물었었다. "시우는 장애니까 우리와 틀린 거네요?" 나는 대답했다. "모두가 살면서 어려움을 겪어. 누구의 삶이건, 삶이라는 달리기 앞에서 장애물은 있어." 나는 스스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지도 모르면서 열살짜리 아이들 앞에서 열변을 토하면서 이야기했다. 장애를 틀린 게 아니라 다양함으로 보게끔 하고 싶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신경다양성의 개념이 내 마음에서 자연 발생된 게 아닌가 싶다. 아이들은 내 말에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그해 나는 교사가 되어 처음으로 1년 동안 담임을 끝까지 해냈다. 메르스 사건으로 3개월 동안 콘서타를 끊었다가 9월 말부터 다시 콘서타를 복용하면서 말이다. 물론 어려웠지만 나는 시우와 아이들을 보면서 버텼다. 안 먹다가 콘서타를 먹으니 일할 때 혼자서 멍하니 있거나 끙끙 앓는 것이 줄어들었고 일이 훨씬 잘 풀리는 게 느껴졌다. 물론 일하는 속도가 느려서 여전히 직장동료들과 소통은 잘 안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