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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03(2/2)

#1

 

그래서 어젯밤 무작정 계획을 세웠다.

휴대폰이 없으니까 도중의 길을 미리 검색해서 봐두고, 환승루트를 생각하고, 걸어서 이동해야 하는 곳은 상상하면서.

친구가 살면서 영영 못 가질 것처럼 굴었던 그 바보같은 한정판 머그컵을 사러 아침에 출발했다.

공부하는 놈이 그런 걸 사러 간다는 걸 집에 알릴 수도 없었지만 거짓말도 하기 싫어서 5시쯤에 조심스레 집을 나섰다.

상쾌한 아침이었다.

미리 인쇄해 둔 계획표를 따라가면서, 부디 내가 갑자기 길을 잃거나 하지 않고

하루 10명인가 20명인가 한정이라는 그걸 좀 사게 해 달라고 먼저 간 놈에게 빌었다.

정말로 기적에 가까웠다.

부산역 안에서 바깥으로 나가는 길도 빙빙 돌며 30분쯤 헤매는 내가

지하철을 타고 새벽 ktx를 타고 서울역에서 공항철도를 따라(처음으로 공항철도를 헤매지 않고 탔다)

공덕을 거치고 홍대 입구를 지나 합정역의, 복잡한 딜라이트 스퀘어의 구불구불한 목적지에 도달하기까지,

정말 1분의 유예도 없이 계획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계획하지 않은 것은… 가게 문이 열리기도 전에 20명 넘게 줄서있던 손님들…

음 실패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내가 마지막인지 나 다음이 마지막인지 한정판 머그컵을 받을 수 있었다.

하면 되는구나 싶었다. 이건 꼭 무작정 외운 영어단어가 시험에 나온 쾌감…이 아닐까 한다.

평소에 노력을 다소 무의미하게 여기는 나지만 보답받는 노력은 참 기뻤다.

그리고 합정역을 나와서 광화문으로 향했다.

또 한 명, 죽고싶다 그러더니 최근에는 또 팔뼈를 다친 친구를 만났다.

1년 넘게 안 만난 사이인데 왜 엊그제 보고 또 보는 것처럼 자연스러운지.

실컷 수다를 떨었다.

경비상 오는 길에 무궁화를 탈 계획이었지만, 이번엔 계획을 어기고 KTX를 탔다. 조금 더 일찍 집에 가서 쉬는 게 공시생으로서는 맞는 것 같았다.

무리해서 아프면 정말 안되니까…

경산에 들러서 친구에게 머그컵을 줬다.

어쨌든 머그컵이야 별 게 아니지만, 이번에는 어쩐지 마음에 진실되게 행동하고 싶었던 것이다.

주고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다가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했다.

정말로.

 

#2

하루종일 유지했던 긴장이 풀리면서 부산 지하철에 도착하고부터는 거의 기절하고 말았다.

그래도 후회가 없었다.

바보같은 걸 사러 무리한 계획을 급하게 실행했지만 나 자신에게 떳떳했다.

과도한 희생이 불러오는, 동등한 보답을 받고자 하는 피드백에 대비하고 있었는데

그런 마음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냥 행복했다.

 

#3

물론 자주 이럴 수는 없을 것이다.

“2019.01.03(2/2)”의 7개의 댓글

  1. #2 ㅜㅜㅜ 전 과도한 희생에 비해 돌아오지 않는 피드백에 상처를 받은 적이 생각납니다… 그러면서 혼자 다짐한게 ‘돌아올 피드백이 없는걸 대비해 너무 과도한 희생을 하여 잘해줄 필요는 없다’ 라고 생각한 적이 있네요…

    그래도 울무나겨님은 그냥 행복했다고 하시니 다행입니다.

    1. 해주고 원망하는 것만큼 한스럽고 바보같은 짓도 없더라고요. 원망하지 않던가, 해주지 말던가 사이의 균형을 잡는 게 중요한 것 같은데… 또 받은 쪽에서는 왜 혼자 해주고 혼자 기대하냐고 그러기도 할 거에요. 근데 심정이… 제가 철이 덜 들었는지 내가 마음 간 만큼 그쪽도 마음을 주지 않으면 정말 서운하지요. 그냥 타인을 도운 게 아니고 연인이나 친구인 경우에 그 피드백으로 인한 상처가 더 심한 것 같아요.
      사실 처음 글을 쓴 것도 그 원망으로 인한 상처를 피해보려고, 내 마음을 지키려고 쓴 거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럴 필요가 정말 없었던 것 같아요 ㅋㅋㅋ “다만 사랑하기”는 사람에게는 정말 어렵습니다. 신앙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런 부분에서 기독교는 참 아름다운 신화에요(뜬금포)

    2. 그리고 뭐… 저 같은 경우는 이런 바보짓을 하는게 (1)에 쓴 옛날 분노 때문이기도 하네요…
      출발은 분노였지만 어제 일은 그냥 행복했습니다.
      이런 게 저한테는 치유가 되는 것 같아요.

    1. 차분님도! 개인적으로는 원망하지 않고 해줄 수 있어서 저에게 이 일 자체가 새해복이었던 것 같아요.

  2. 생각해보면 피드백은 앞으로의 삶에서 얼마든지 올 수 있다. 서운한 일이 있을 때마다 내가 약해졌을 때마다. 즉 누군가를 도왔을 때의 행복은 삶의 방식을 유지하는 한에 있어서의 일시적인 상태이고, 내가 “피드백”이라고 말한 부정적인 감정이야말로 일시적으로 오거나 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왔을 때는 지속적으로 삶을 지배하는 것일 것이다.

    어쩌면 그렇게 이성이 약해지는 순간을 위해서 종교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순결한 어린양의 제의는 그래서 효과가 있다.
    “예수”에 비하면 내가 억울할 게 뭐가 있겠는가 말이다. 실제로 예수가 어떤 사람이었건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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