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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29

#1.

슬픈 시가 왜 힘이 되는지 힘을 받으면서도 모르겠다.

 

 

 

가끔 네 꿈을 꾼다.

전에는 꿈이라도 꿈인 줄 모르겠더니
이제는 너를 보면
아, 꿈이로구나.
알아챈다.

 

황인숙 시집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2.

구글링하다 눈에 띈 일본어 버전
(우주배경 뭔데…)

 

 

 

 

 

 

한국어 버전의 묘미가 잘 느껴지지 않는 것은

내 일본어 수준이 낮아서인지 모국어가 아니어서인지 일역 수준의 문제인지…

(모르겠-더니를 わからなかった-のが로 번역한 부분이 너무 느낌을 죽이는 것 같다.
-더니는 한템포 쉬면서 끊어주는 느낌인데 のが는 꼭 설명하듯이 이어붙이는 것 같아서…
그렇지만 -더니의 느낌을 살릴 수 있는 다른 일본어로 살려보라고 하면 못하게씀.)

 

 

 

#3.

 

 

 

네이버 블로그 등에서는 저걸… 사랑과 관련된 시라고…

막 감성 폭발하는 가을밤 시선(詩選)!에다가 넣어놓았는데…

사실 내가 황인숙이라는 이름과 저 시를 기억하는 것은 친구의 죽음이 계기여서

죽은 사람을 떠올리는 시라는 인상이 강하다. (친구는 보고싶지만 나는 게이가 아니야…)

 

 

처음에는 꿈에 나와도 이상한 줄을 몰랐다가

점점 현실에 그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닫으면서

꿈에서도 나오면 아, 이건 꿈이구나 하는.

나는 딱 그렇게 현실을 받아들이던 시기에 저 시를 읽었었다.

물론 뭐 연인이랑 헤어지고서도 비슷한 감정을… 받을 것…도 같긴 하다.
(난 아니었기에.)

 

 

#4.

 

 

평~온 하다.

다른 사람들이 맛집 가서 인스타 올리는 걸 보면서

나는 똑같이 뭐 먹으러 가서 저렇게 사진 올려도 저 사람들처럼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 좀 콤플렉스였는데
(그래서 안함 ㅋㅋㅋㅋ 집에서 요리해서 동생 밥먹이는 게 더 행복함 ㅋㅋㅋㅋㅋㅋ)

나한테는 내 즐거움이 있는 거지.

앞으로는 시집이나 읽어야겠다.

 

 

 

#5.

 

 

그래도 뭐 아는 시인의 범위를 좀 넓혀야겠다는 생각은 든다.

 

 

 

삶 

왜 사는가?

왜 사는가……

외상값.

(황인숙·시인, 1958-)

 

 

 

황인숙 선생님 시 다 좋은데 너무 아파.
짧고 굵고 아프다고…

사랑시에는 차라리 아래가 더 어울리는 것 같고…

 

 

 

그리움/ 전혜린

거리만이 그리움을 낳는 건 아니다.

아무리 네가 가까이 있어도

너는 충분히, 실컷 가깝지 않았었다.

더욱 더욱 가깝게, 거리만이 아니라

모든 게, 의식까지도 가깝게

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움은,

– 유작집 《이 모든 괴로움을 또다시》(1976)

 

 

 

사실 뭐 전혜린 선생님 집안은 친일 명부에 올라 있고,
유신독재의 시대에 독일 유학까지 간 사람인 데다
결혼하고, 아이 낳고, 이혼하고, 독일에선 제자와 염문설 뿌리다가
(<마지막 편지> 보면 진짜 같은데 선악을 떠나서 결혼에 맞지 않는 사람 같다)
마지막엔 자살로 생을 마감…

그러니 뭐 바람직하냐 바람직하지 않냐로 보면 후자인데…
이상하게 이런 사람의 이런 우울함이 내 근본적인 외로움에는 약이 되니 영 영문을 모르겠다는 것이당…

“2018.11.29”의 5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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