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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2 – 뱁새

저번에 쓴 글을 이어서 쓰려고 했으나 그러면 너무너무 긴 장황한 똥이 나올 것 같아 밤을 홀딱 새야하기떄문에,  요번엔 또 다른 회상의 짤막한 글을 써보았다.(써보니 안짧은 것같지만)

#1 첫 좌절
지금은 누구나 당연하게 컴퓨터를 능숙하게 다루지만 90년대중반~2000년대 초반의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시절만 해도 아니었다. 당시 우리 세대는 살아생전 컴퓨터를 한 번도 만져보지 않은 아날로그세대와 태어나자마자 컴퓨터와 휴대폰과 함께 부대끼며 살아가는 디지털세대 가운데에 끼어 태어난,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톱니바퀴가 서로 맞물려 마찰음을 내는 과도기시대였다.

당시에는 Window7도 아닌 Window95가 보편적이었고 지금은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커다란 플로피 디스크에 소닉과 같은 미니 게임 하나를 용량 가득 채워 겨우 담아 친구 집에서 같이 즐기곤 했다. 당시 최첨단 컴퓨터의 기준은 컴퓨터에 CD-ROM이 달렸냐 안달렸냐, 4배속 CD-ROM이냐 8배속 CD-ROM이었냐 등 지금은 쓸모도 없는 기준이었으며 인터넷이 느려서 영화한편(그것도 불법캠버전)을 다운받으려면 몇날며칠, 길면 몇주일을 기다려야 하기도 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 까지 남들보다 발달이 조금 늦었다.(초등학교 1학년까지 내 이름을 직접 발음을 못해서 누가 내 이름을 물어보면 ‘삐삐’라고 대답했다고 한다….창피…) 그런 내가 유독 컴퓨터에 집~요한 관심을 보여 그 당시에는 무척 빠른 초등학교 2학년이라는 어린 나이에 컴퓨터학원을 다니게 되었다. 특히 내가 생각한 것을 모니터에서 즉각즉각 확인할 수 있는 프로그래밍,코딩에 푹 빠졌다.

남들보다 빨리 시작한 만큼, 고학년이 되자 초등학생치곤 꽤나 괜찮은 코딩실력을 지니게 되었고 마침내 중학교 1학년 때는 학교대표로 광역시대회에 나가 입상을 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학원에는 내 이름 석자가 써있는 플랜카드가 걸렸고, 어른아이 할 것 없이 모두 나를 코딩잘하는 아이라고 치켜세워주었다. 그에 긍정적인 피드백으로 인해 나는 더욱 프로그래밍과 알고리즘공부에 힘을 쏟았다. 난 스스로가 특별한 사람, 프로그래밍관련 재능이 출중한 사람이라 생각했고, 장래희망은 곧 죽어도 프로그래머였다. 이를 증명헤 보이기 위해서 더더욱 악착같이 프로그래밍공부에 매진했다.

광역시대회가 끝나고 그 다음은 전국대회였다. 난 다른 건 몰라도 코딩에는 재능이 있는 아이라고 확신했으며, 부단히 노력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시험이 시작되자 그 자만감은 처참히 무너졌다.

꽤 오래 지난 지금도 그 때의 풍경, 무거운 공기, 당혹감, 질투 등의 복잡한한 감정 등이 잊혀지질 않는다.
Q-BASIC이라는 TOOL을 써서 두 문제를 코딩해야 했고, 시험시간은 4시간이었다.
4시간동안 나는 코딩을 시작할 수 조차 없었다. 정말 문제 자체를 단 1%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문제를 읽고, 또 다시 읽어도 어떤 말인지,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남들도 어렵겠지?하고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다들 너무 능숙하게 문제를 풀고 있었고, 심지어 한 문제정도는 벌써 푼 학생도 있었다. 물론 나처럼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아이들도 있었으나 소수였다. 한시간 반정도가 지나자 슬슬 포기한 학생들과 문제를 다 푼 학생들이 같이 뒤섞여 시험장을 나가기 시작했다. 세시간이 지나자 대부분의 학생들이 시험장을 빠져나갔으며, 마지막 오류를 찾기위해 고군분투하는 몇몇 학생들과 코딩을 시작하지도 못하고 시험지를 붙잡고 있는 나만이 남았다. 3시간이 다되도록 문제를 읽고 또 읽었다. 마치 기원 수천년전에 쓰인  도저히 알 수 없는 고대문자들을 해석하려 고군분투하는 고고학자처럼.. /

집중력이 흐트러지고 희망이 없다는 걸 깨달은 후에서야 이루말할 수 없는 자괴감이 몰려왔다. 지난 4년간 밤늦게까지 공부했던 내 모습들, 주위에서 칭찬해줬던 선생님, 친구들, 가족이 주마등처럼 스쳐갔고 내 자신이 너무 창피했다. 난 결국 빈 모니터인 상태로 시험을 마쳤다. 운동장에서 대기하고 계시던 학원선생님이 나에게 시험을 잘쳤냐고 물어보았을 때, 그제서야 4시간동안 꾹꾹 참았던 울음이 터져나왔다.

중학교 1학년, 내 어린 인생의 첫 크나큰 좌절이었다.

그 일이 있는 후 6개월 후, 나는 컴퓨터학원을 더 이상 나가지 않았다.
재능이 있는 줄로만 알았는데, 내가 잘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난 그냥 남들보다 일찍 스타트를 끊어서 남들보다 앞에 있었던 것이지, 내가 절대 달리기가 빨라서 그런건 아니었던 거다. 그저 뛰면서 남들의 환호와 자아도취에 빠져 뒤에서 얼마나 빨리 달려오고있는지를 몰랐을 뿐.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 중고등학교 6년동안 내가 프로그래밍이나 알고리즘공부를 할 일은 없었다.(수능관련 빼고)

대학교전공은 어렸을 적 꿈꾸던 컴퓨터공학관련 과를 가진 않고 그저 앞길이 가장 유망할 것 같은 전기전자공학부를 선택했다. 코딩과 완전 무관한 학부는 아니었어서 전공기초 수업중에 코딩관련 수업이 있었다.
국영수과학위주로 공부했던 동기친구들은 아예 코딩 툴을 사용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많이 해맸지만, 나는 아무래도 어렸을 때 다뤄봤던 것들이라 훨씬 수월했다.
동기들이 숙제 프로젝트진행을 어려워할 때 선뜻 나서서 도와주었고, 또 어느샌가 나는 코딩을 잘하는 학생으로 언급되었다. 기초단계를 지나 수업이 학기말을 향해 가자 수업 때 배우는 알고리즘이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많이 어려워졌다. 마지막 프로젝트로 상당히 어려웠던 걸로 기억하는데 최단경로+자료구조+재귀를 복잡하게 짬뽕시켜놓은 문제를 교수님이 숙제로 내주셨다. 다른 수업은 제쳐두고 이 프로젝트에 내 모든 시간을 할애했다.

내가 코딩을 좋아해서 그런걸까. 아직 나에게 코딩에 관해 재능이 있다는 걸 어떻게든 다시 한번 증명해보고 싶었던 걸까. 모르겠다.

도서관에서 밤을 새가며 그 숙제에 매달렸다. 생각한 것 만큼 문제가 풀리지 않았고, 결국 나는 노가다성으로 코딩을 무려 1200줄 넘게 짜서 마감시간에 맞춰 가까스로 제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우연히 내가 학기 초 숙제를 도와주던 동기가 제출한 숙제코드를 보게 되었는데, 단 300줄정도로 교수님이 내신 문제를 아주아주 감탄사가 나올정도로 깔끔하게 풀어내었다.

내가 거의 일주일동안 메달려서 그것도 겨우겨우 1200줄이나 써가면서 푼 문제를 그 친구는 단 이틀을 투자해서 300줄로 깔끔히 해결해내었다.

중학교 1학년 때 느꼈던 쓴 맛이 아릿하게 잠시 느껴졌으나, 그 때처럼 자책하게 되거나 질투가 나진 않았다. 어찌됬든 학점은 나오잖아?(사실 그 학기에 평균학점은 처절했다. 왜냐하면 이 수업뺴고 다른 수업들은 술먹고 동아리방에서 자느라 아예 출석을 잘 하지 않아 D,F가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 수업하나는 건졌다. 하하)
그 때 통렬히 미리 느꼇던 좌절감이 어찌보면 큰 약이 되었나보다.
만약 그 사건이 없어서 마치 내가 어른이 될 때까지 프로그래밍에 재능이 있다고 착각하였으면 어찌됬을까 그 또한 끔찍하다.

그런의미에서 노래 하나 추천드립니다.
제가 애정하는 가수 선우정아님의 곡 , 뱁새
https://www.youtube.com/watch?v=LIT2xMBI17E

“잡담#2 – 뱁새”의 5개의 댓글

  1. 남들은 짧은 시간에 퀄리티 있게 뽑아내는데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도 저퀄 아웃풋일 때가 많죠
    그때는 단순히 내가 조금 부족한가보다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면 @때문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드네요

  2. 만약 그 사건이 없어서 마치 내가 어른이 될 때까지 프로그래밍에 재능이 있다고 착각하였으면 어찌됬을까 그 또한 끔찍하다
    ==> 무슨 감정인지 너무 잘 이해됩니다.
    저도 지금은 담담해지는 것에 완전히 적응했죠.
    음악선곡까지 완벽합니다요…

  3. 글을 정말 잘 쓰시는거 같아요 ㅋㅋ
    다음 얘기도 정말 기대됩니다.
    저도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중3 때까지 컴퓨터학원을 다녔고, 대학교에서는 컴퓨터공학과 1년만 다니다 자퇴한지라 공감이 조금 가네요…

    광역시대회에서 은상탄 적도 있었어요 ㅋㅋ(겨우 타이핑이지만.)

    저도 음악추천하는 글을 써봐야겠네요. 선우정아 좋아요!

  4. 글 잘 읽었습니다! 공감이 가서 좀 웃기도하고 가슴이 아프기도 하네요.. 선곡해주신 노래도 넘나 좋아요. ㅠㅠㅠㅠ

  5. 일찍 스타트를 끊었을 뿐 절대 빨리 달리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말 왜이리 공감가죠…?
    어릴 적 겪었던 많은 좌절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며 눈물이 나네요…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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