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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당 못할 구라의 말로
Level 3   조회수 252
2019-11-13 21:24:19

내가 한 대학교의 신입생이었던 4월의 어느 월요일이었다. 중간고사를 다음 날의 나에게 떠넘긴 채 전날 과음했는데도 불구하고 눈을 뜨니 머리가 아주 개운했다. 속이 더부룩하거나 배가 아프지도 않았다. 이정도 컨디션이라면 시험에 모르는 게 나와도 A는 거뜬히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든 게 완벽했다. 창밖의 노란 햇빛이 아침노을일 리는 없다는 걸 깨닫기 전까지는.


'중간고사 결석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인터넷에는 나 말고도 중간고사를 빼먹은 사람들이 넘쳐났다. 그리고 그만큼 대처 방법 또한 다양했다. 유행하는 전염병 걸리면 중간고사도 병결 인정해줄 거예요, 예비군 갔다 하세요, 부모님이 돌아가셨다 하세요 등등. 하필 그 해 유행하는 병은 조류독감밖에 없었고, 나는 미필이었으며, 부모님을 돌아가셨다고 하느니 차라리 내가 진짜로 죽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인터넷을 뒤지고 뒤져 겨우 실현 가능한 해결책을 몇 개 찾아냈다. 교수님께 시험만이라도 볼 수 있게 비세요, 군대로 도망가세요, 그냥 재수강 하세요, 성적표 나오기 전에 자퇴하세요.


그래서 나는 자퇴했다.


허락보단 용서가 쉽다는 격언에 따라 부모님께는 자퇴 절차가 끝난 뒤 얘기했다. 당시 외국에 있던 엄마가 날 때리러 비행기를 탈 리는 없다는 생각에 엄마에게만 먼저 얘기를 했는데, 집에 도착하니 아빠가 나를 쇼파에 앉아 불렀다. 그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전자담배 수증기가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드라이아이스 효과처럼 느껴졌다.


"자퇴했다고?"


나는 프리스타일로 그럴싸한 자퇴 이유를 만들어냈다. 학과가 잘 안 맞았고, 학교가 마음에 안 들었고, 거긴 취직도 힘들 것 같고, 조금 지치기도 해서 쉬고 싶고... 여러 이유를 떡볶이마냥 즉석에서 만들어냈음에도 불구하고 아빠의 표정에선 점점 살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강력한 한 방이 필요했다. 미국의 핵무기, 손오공의 에네르기파, 격투 게임의 아도겐, 애인의 "라면 먹고 갈래?" 같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나, 서울대 가려고."

"..."

"조금만 재충전의 시간을 갖고 다시 수능 봐서 서울대 갈게. 진짜로."

"그럼, 언제까지 쉴 건데?"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열심히 혓바닥으로 기름칠을 해댔다.


"아빠, 나 계획 갖고 자퇴한 거야. 우선은 조금 쉬면서 워홀 같은 거 다니며 식견을 넓힐 거고, 그러면서 돈도 조금씩 모을 거고, 군대도 해결할 거고, 그 다음에 대학 갈 거야. 어차피 요즘은 대학 바로 가도 군대 갔다가 휴학 몇 번 하고 하면 졸업할 때 30이잖아. 나는 대학 다니며 할 휴학이나 군대 등을 그 전에 해결하는 거지."


한 번 터지기 시작한 구라는 멈춰지지 않았다. 말에도 관성이 있었던가, 그래서 멈추려고 해도 맘대로 멈출 수 없던 건가. 3분 정도만 가만히 놔둬도 알아서 대선 출마 계획까지 세울 판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빠의 표정이 좀 나아졌다는 것이었다.


"그래. 그러면 20대 중반, 26살까지는 네 맘대로 해. 하지만 27살에 넌 서울대생이라야 한다."


그렇게 나는 수능을 봐야 하는 운명에 처해졌다.


-2부에서 게속- 


*이 글엔 구라가 10% 포함돼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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