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커피랑 같이 먹을 쿠키를 사오려다가 말았다. 집으로 올라오는 오솔길에 위치한 수입과자 가게에서 매일 한두개씩 봉지에 담아 들고 오곤 했었는데 지갑사정으로 봐서든 뱃살사정으로 봐서든 멈추는 것이 옳았다. 요기용이라면 며칠 전에 쿠팡으로 배송시킨 아침 대용 호박죽이 있었다. 호박죽에 커피는 영 아닌 것 같으면서도 위에 편안하게 잘 어울렸다.
합격으로 인한 변화는 아직 일을 시작하지 않았는데도 몰아닥치는 중이다. 여자친구가 생겼고,한 달에 일주일 가량을 타지에서 보내고 있다. 할아버지를 그동안 못 뵀고 앞으로 오래 못 뵐 예정이라 시골에 종종 방문하게 되었다. 시골-여친-집-시골-여친-집. 역시 호텔이 아무리 좋은 곳이라고 해도 집보다는 못하다.
아무래도 그 동안 사람 노릇을 못한 데에 adhd 말고도 눈코입 문제가 더 있지 않나 싶어 안과에 갔더니 안검하수랑 사시 이야기를 했다. 라섹or라식, 치아교정, 눈매교정 중 하나는 지원해주겠다고 부모님이 말씀하셨다. 치아교정은 사랑니를 4개나 뺴고 시작한다고 하고 라섹은 돌이킬 수 없게 될까 무서웠다. 눈매교정은 눈으로 보는 시야가 커지는 느낌도 들고, 무엇보다 책이든 핸드폰이든 오른눈으로만 보는 게 왼눈의 안검하수 때문일 수가 있다고 해서 선택했다. 아니 내가 성형을 하게 되다니. 수술중에 의사가 혹시 틱이 있냐고 물어보더니 왼쪽 이마가 자꾸 올라간다고 했다. 오징어 타는 냄새를 맡으면서 힘을 빼기가 어려웠다. 그냥 수면마취 한다고 할 걸...
#2.
이 모든 과정에서 쓴 돈이 2개월에 300만원에 가까웠다. 사실 기존에 옷을 산 적이 없고, 공부를 마쳤을 때는 입을 팬티조차 2개밖에 없었던 나라서 마치 신생아처럼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사야 했던 게 컸다. 신발은 맞지 않는 아버지 신발을 늘 신고 다녔었고, 옷은 독서실용 옷 말고는 전부 오래된 것들 뿐. 2017년에 공시를 시작했고 2016년에 졸업했고 2014년에 전역한 걸 생각하면 나는 사실 2012년부터 늘 뭔가를 위해 달리고 있었지 내 즐거움을 본격적으로 추구한 적이 없었다. 그 시절 내내 30만원이라는 용돈 안에서 생활했고, 아르바이트는 길어야 1개월에 잘렸으므로 나는 지금껏 쓴 돈의 액수에, 앞으로 쓰게 될 액수에 생존의 스트레스를 느끼고 있다. 곧 취직해서 돈을 벌면 달라지겠지만 이런 부분에서 나 자신이 아직도 고등학생 정도에 머물러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여자친구랑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비슷하다고 생각한 부분 속에 다름이 있고 다르다고 생각한 부분들 속에 같은 부분이 있다. 너무 달라서, 혹은 너무 닮아서 만나기 좋거나 나쁘다기보다 '그럼에도' 계속 만나기를 추구하는 것이 관계의 생명인 것 같다. 쉬운 인생이 없는 만큼 같은 인생도 없고, 종종 싸우더라도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는 한 상처입고 상처입히면서 정드는 부분도 있구나 하고 생각한다. 정말 이런 부분에 대한 인식도 십대 후반에 머물러 있다. 해 본 적 없는 일이니까.
#3.
물고기가 죽는 모습이 두려워서 키우지 않겠다는 마음과 그럼에도 키우려는 마음이 항상 공존한다. 지금은 그럼에도 키워보자고 생각한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 일이든 무언가를 사는 일이든, 결국 써버릴 돈을 벌고 결국은 늘 평안하지는 않은 관계를 유지하고, 그게 사는 일이겠지.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여유가 생겼다는 뜻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