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2
11월 19일 금요일 xxx 정신과 에서 아토목세틴에서 콘서타 18mg을 추가 복용받았다.
20-21일 주말 기간 콘서타의 약효가 막 눈에 띌 정도로 체감된 것은 아니었다.
집중을 크게 요하기 보다는 연극 감상, 경복궁 야외 러닝 등 머리를 크게 쓰지 않는 활동을 주로 했었으니까.
대망의 댄스스포츠 수업 당일.
댄스 스포츠 12주차 수업 때 내가 홀로 느낀 감격을 겹강하는 친구는 전혀 눈치 채지 못했을 것이다.
세상에,,,, 댄스스포츠 수업 한 학기동안, 아니 어쩌면 내 인생 처음으로 수업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댄스 스포츠 수업은 그동안 내게 참으로 곤욕이었다.
교수님이 말을 하며 지도하셔도 나는 이 동작이 어디에 쓰이는 것인지, 왜 이 동작을 배우는 것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자이브가 원채 어려워서가 아니냐고? 그렇다고 하기에는 남들이라면 기본적으로 이해할 사항들조차 머릿속에 흡수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런데 이 날은 내가 수업 내용들은 머릿속으로 정리하고, 이 동작이 어디에서 사용되는 것인지 구조화할 수 있었다. 그동안 배운 내용이었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했지만 너무 감격스러웠다. 보통 사람들은 이렇게 살아왔구나. 나와 같은 교실에서 수업을 듣는 이 학생들은 나랑 나르게 수업을 들어왔구나. 머릿속에 강의 내용을 담을 수 없어 교수님 동작, 다른 학생들 자이브 동작을 흘끔흘끔 보며 따라하는 데 급급했던 내 자신이 수업 내용을 머릿 속으로 담아내다니.... 참으로 감격스러웠지만 동시에 허탈했다. 약 하나로 해결될 문제였다는 걸 22년 동안 알지 못했다. 그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고 그럴 수도 없었다. 단지 남들과 다른 뇌를 가졌다고 해서 내내 불편함을 안고 살아가야 했구나.
이 게으른 내가.... 수업 끝난 후 집에 오자마자 어지러운 집안을 정리했다. ADHD들의 만성적인 악습관인 '미룸'이 사라졌다.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순서를 생각하면서 말이다. 수건은 어디에 놓아야하는지, 빨래는 바구니에 먼저 집어넣은 다음 세탁기에 돌려야 하고... 쓰레기들은 보이는 대로 일반 쓰레기 봉투에 넣자. 미룰수록 힘드니까 꽉 차면 바로 집 앞에 버리고!! 방 청소 끝나면 해야지.
헛웃음이 났다.
11.23
그토록 시도했건만 대학 생활 내내 하지 못한 미라클 모닝을 처음으로 성공했다.
8시에 침대에서 기상해서 대충 옷을 갈아입고 도림천에서 아침 러닝 및 턱걸이 연습을 하고 왔다.
24시간 효과가 지속되는 아토목 세틴과 콘서타를 함께 복용해서 가능한 일이 아니었나 싶다.
콘서타는 항정신성 약품인만큼 효과는 강한 대신 지속 시간이 12시간이다.
아토목세틴은 24시간 동안 노르에프네프린의 재흡수 방지를 통한 효과를 지속시키고.
이날은 과 동기들과 졸업앨범을 촬영한 날.
콘서타의 영향으로 평소보다 차분해졌다. 내가 굳이 꺼내도 되지 않을 말을 입 속에 삼킬 수 있었다. 따릉이를 타고 학생회관에 오느라 2시에 딱 소형연습실에 도착했다. 이미 메이크업 받고 있는 친구들이 있어 학생회관 동아리방에서 STCO 양복으로 갈아입고 다시 내려왔다. 숨을 헐떡이고, 지각할 뻔한 지라 흥분되있는 상태에서도 차분히 양복을 갈아입을 수 있었다. 머리는 어지럽고, 옷은 무얼 먼저 갈아입어야 할지, 넥타이는 어떻게 매는 거더라, 비닐은 왜 안 뜯겨 아 짜증나 되는게 없어!!! 이랬을 내가 행동을 하기 전 먼저 양복을 어느 순서로 입어야 할지 고려할 수 있다. STCO 사장님께서 넥타이 지퍼를 풀고 목에 묶는 법을 먼저 머릿속에 떠올린 다음 넥타이를 맨다. 차분하게. 양복을 다 갈아입고 헛웃음이 나온다.
일종의 난독증세가 사라져서 라운지 내부 팻말에 적힌 졸업앨범 가격 설명을 읽고, 기본적으로 내야 하는 45000원 이외에 추가 비용만 낸다면 고화질 사진 파일과 인화된 사진들, 액자를 구매할 수 있음을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다.
ADHD 약물치료의 결과는 다양하다. 열 명 중 한 명은 효과가 없다. 한 명은 정신과 선생님께서 '대박'이라고 말할 정도이다. 보통은 그저 그런 결과를 보인다. 나는 소위 말하는 '대박'의 케이스였다.
햇빛이 있다면 그림자도 있는 법, 콘서타로 인한 식욕 감퇴 부작용으로 이 날 이후 이틀 연속 한 끼만 먹었다.
11.25
멘토링 알바를 위해 2시간만 자고 7시에 기상해 8시에 관악우체국 양지병원 앞 정류장에서 5530번 버스를 기다린다. 불안증과 가슴 두근거림이 더 심해져서 고생이다. 멘토링 마무리 후 칠판에 붙여진 현수막을 떼오는 것을 깜빡했다. 집중력 부족 덜렁거림의 ADHD 기질을 원망한다. 교실에서 수업 끝나자 마자 집 갈려고 했던 어리석음도 타박한다. 약 복용이 주는 장점은, 약 효능 아래에 있는 나는 최소한 같은 실수는 반복하지 않을 것이란 점이다. ADHD의 만성적 고충, 잘못된 건 알고 고칠려고는 하는데 또 까먹어서 결국 실수를 반복한다. 최소한 이를 되풀이하지는 않을 것이다.
11.26
친구들과 여행을 가기 전 정신과 상담 및 약 처방을 받았다.
콘서타가 나에게 준 기적같은 결과와 순간들에 대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씀드렸다.
원장님께서 계속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신다. 괜히 속으로 주눅들지만 티는 내지 않는다.
왜... 여전히 이분은 날 ADHD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인가?
내가 서울대생이라서?
"음... 지금 xx씨께서 말씀하신 내용들 모두 ADHD의 전형적인 증상입니다. 그런데 제 생각과는 다르게 ADHD 중에서도 심각한 정도이네요."
'.... ADHD 중에서 심각한 수준이라는 말까지 들을 준 몰랐네... 내 증세가 이 정도로 심했었나....'
"도대체 어떻게 그 정도의 성취를 이뤄낸 겁니까? 서울대 치대에 동아리 회장에... 대인관계도 크게 안 나쁘신 거 같고. 참 신기하네요..."
여행 전 잠깐 집에 들렸다. 너무 피곤했다. 그리고 펑펑 울었다. 어렸을 때의 발달 장애를 제때 바로 잡지 못해 남들과 다른 뇌 기능을 가지고 살아왔다. 정말이지 내 인생은, 엉망 진창이었다. 최악이었다. 늘 바뀌려고 했다. 그런데 변하지가 않았다. 남들은 10-20분이면 끝낼 일 1시간 동안 끙끙거렸다. 인강 다운이라든지.... 뭐 그런 생활적인 부분들 말이다. 그로인해서 불안과 우울, 자기비하와 자기 모멸, 혐오를 안고 살아왔다. 충동성과 과잉행동을 제어하지 못해 남들에게 웃긴 사람, 돌아이로 비춰졌다. 소위 말하는 웃긴 행동을 하고 난 이후, 혼자 자기 비하에 시달렸다. 왜 그런짓을 했을까. 그런데 다음엔 내가 또 그러고 있다.
머릿속에 이해안되는 공부, 그냥 무식하게 했었다. 영어 기본 강좌 끝나고 수능 특강, 수능 완성 수업때는 1시간 20분 동안 자리에 앉아있으면 1시간 동안은 다른 생각을 했다. 선생님의 말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과학을 정말 싫어했다. 원리를 깨우쳐야 하는 과목인데 강사님의 설명을 들어도 특정 단어만 머릿속에 들어오고 문장 형태로 인식이 안된다. 과학은 내게 지옥의 시간이었다.
남들과 달랐기에, 남들보다 뒤떨어졌기에 겪어야 했던 고충들은 타인의 시선을 극도로 신경쓰게 만든다. 늘 남이 중심이고 남들의 시선에 어떻게 보이는 지가 중요하다.
대학 입학 후 1년 동안은 그냥 놀았다. 문제는 2학년부터. 뭔가 인생의 유용한 일들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려 해도 노력이 안된다. 무기력증 게으름 미룸에 시달렸다. 꽂힌 것에는 1차원적으로 집착하지만 뚜렷히 합리적인 이유는 없다. 책을 읽어도 이해가 안되니 책상 위에 책들을 치워버린다. 좋은 학점을 받기 위해 교양 강좌를 들어도 전혀 새로운 지식들로 가득찬 교수님의 설명은 집중도 인식도 되지 않는다. 깨질 듯히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시간만 보낸다. 수업을 아예 듣지 않거나. 과제를 해도 무식하게 하는거나. 생각해보면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었던 것 같다. 성적은 한 번 잘 받았던 것 같다. 토플도 괜찮게. 토플 3개월 준비했는데 마지막 한 달은 거의 토플 공부를 안했다. ADHD들은 엄청 위급하거나 절박하지 않으면 행동을 할 수가 없다. 어느정도 성적이 올라가니 그 이후로 노력을 할 수 없다. 난 노력하고 싶은데 내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공부하고 싶고 영어 리스닝도 더 하고 싶은데. 제대로 성취한 게 없는 부끄러운 나날들. 자기 비하와 우울감은 더 심해진다.
별의 별 생각이 다 든다.
어떤 인생을 살아온거니.
하지만 1분정도만 울고 바로 눈물을 닦아버린다.
겨우 이 정도 아픔으로 무슨 자랑질을 할 수 있단 말이야.
나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 더 희생하고 많이 고생한 인생들 넘치는 게 이 세상이다.
바쁜 꿀벌은 슬퍼할 시간도 없다.
모두들 말 못할 사연 하나쯤 가슴에 품고 광대 가면 쓰며 살아간다.
마음 추스르고 여행 고고씽~
11.28
콘서타를 먹었음에도 브레인 포그 현상이 가시지 않는다.
두 가지 원인이다.
약에 대한 내성, 당일 오랜 드라이빙으로 인한 어지럼증. 운동 등을 통해 흥분을 하거나 (아드레날린 분비와 관련이 있으려나?), 차량 탑승으로 인한 어지럼증, 불편한 사람과의 만남 등 소위 편하지 않은 일을 겪으면 두뇌가 약을 먹기 전의 나로 되돌아간다.
마무리
거진 2년 날 미치게 한 무기력증도 사라졌다.
만성적인 일 미루기, 난독, 갑자기 흥미 생긴 일에 1차원적인 집착, 눈치 없는 말, 과잉된 행동, 머릿속 안개가 낀 듯한 비현실감, 낮은 시간관념 등 ADHD 증상들은 많이 호전되고 있다. 식욕부진, 성욕감퇴, 불안 등의 부작용은 있다. 약에 계속 내성이 생기기도 하고, 스트레스 받는 일에는 다시 원래의 나로 돌아가기도 한다.
딱히 동정받거나 응원받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런거 별로 안 좋아한다. 역으로 ADHD로 인해 고생하는 사람들의 삶을 동정하고 위로해주고 싶지도 않다. 그들과 공감하고 순간 눈물을 흘릴 순 있지만. 결국 다들 나름의 고충이 있다. 전 인구의 2-4% ADHD들이 모두 실패한 인생을 사는 것도 아니다. ADHD임을 탓하기 전에 뭐라도 노력을 해보는 것이 본인 인생에 더 도움될 것 같다.
ADHD들의 80%는 불안, 우울과 같은 공존질환을 동반한다. 그리고 상당수는 우울증 상담을 위해 정신과를 방문했다가 ADHD임을 알게된다. 나 또한 우울증 상담을 위해 정신과 약을 복용받았다. 문제의 근원을 해결하는 것이 아닌 겉으로 빙빙 도는 그분이었다. 정신과를 방문하고 반 년 정도가 지나서야 블로그의 글을 통해 내가 ADHD임을 자각하게 되었다. 정신과에서 약을 처방받기 3개월정도가 지나서야 뚜렷한 약효를 보게 되었다.
ADHD는 우울할 일이 참 많다. 우울증 때문에 ADHD 증상이 심해지고 ADHD가 망친 인생이 날 우울하게 만든다. 하지만 둘은 확실히 다르다. 우울증은 슬프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ADHD는 뭘 하려고 해도 실패와 좌절을 겪는다. 뭘 해도 되지 않는 현실때문에 우울해진다. 공부를 하려고 해도 지식 습득을 잘 못한다. 나이에 맞지 않는 사고를 하고 집안이 어지럽다. 생각 없이 말해 주변을 혼란스럽게 하고 말은 많은데 영양가가 없어 대화가 피상적이다. 인간관계도 겉으론 괜찮지만 피상적이고 얕은 관계가 되기 싶다. 잘 잃어버리고 잘 까먹고, 충동적이고 눈치가 없다.
하지만 ADHD이기에 매순간 행복을 시험받는다. ADHD이기에 인생을 치열하게 살았는지, 혹은 최소한 그런 시도는 했는지 평가 받는다. 약물 치료는 본인이 변화하려는 의지가 동반되어야 최고의 효과를 낸다. 내가 ADHD라는 확신이 있어야 하고, 약물이 내게 어떻게 작용하는지 부작용은 무엇인지, 부작용을 어떻게 최소화하고 효과는 어떻게 지속시킬 수 있을 지 내 몸과 뇌와 끊임없는 대화를 해야한다. 10%의 '대박'은 그런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닐까.
불행에 가까운 인생을 살아왔고, 아무리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글을 읽고 말을 해도 그 사실은 변함이 없다.
이에 비유하는 것이 맞는 지는 모르겠지만 둘다 신체 일부의 기능 이상으로 인한 장애이고, 특정 수단을 통해서 치료할 수 있으니 예를 든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색깔을 보게 된 사람들' 유튜브 영상을 보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색깔을 보게 된 사람들은 색맹 안경 렌즈에 투과된 색깔있는 세상을 보고 말을 잊지 못한다.
눈물이 날 것 같다. 굉장하다. 살짝 울 것 같다. 다양한 반응들이 나온다.
주황빛, 붉은 빛, 노란 빛이 어우러진 도시의 저녁 노을 앞에선 색맹 남자가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은 이걸 매일 보고 살았다는거죠?"
콘서타 복용 후 남들은 이렇게 산다는 사실이 참 부러웠고 허탈했다.
처음에는 부모님을 원망했다. 내 자신을 혐오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 덕에 내가 지금 당연하게 가지고 있는 사소한 사실들에 더욱 감사하게 되었다.
온전한 두 눈을 가진 것, 완전한 사지로 땅을 걸어 다니고 물건을 만질 수 있다는 것에.
스트레스 받을 때 맵고 달짝지근한 떡볶이 맛을 느낄 수 있는 혀를 가지고
아름다운 음악 선율을 담을 수 있는 귀를 물려받은 것에.
복잡하게 살지 않을 수 있게 해준 신께 얼마나 감사한가!
비우기에 더 후련하고 부담없는 인생은 얼마나 자유로운가!
작은 일에도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는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
내가 왜 남들보다 못할까
못 가졌을 까 못날까
생각하지 말자
'내가 평범하다'고 말하고 느낀다는 것이 무한한 기적임을 명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