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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 일등 ADHD의 고교생활, 서울대생 ADHD의 대학 생활
Level 3   조회수 1067
2022-02-02 21:57:49

나는 성인 ADHD이다. 어린 시절의 발달 장애를 제때 바로잡지 못했다. 22살 성인 때까지 ADHD는 줄곧 나를 괴롭혔다.

불안, 우울, 낮은 자존감, 잦은 실수, 대인관계의 문제, 공황, 자기 혐오, 자기 모멸, 난독증, 청각난독증, 귀찮음을 넘어 병적이었던 미룸, 때때로의 극단적 사고와 자살 충동

정신과 한 번 가지 않고 대학교 2학년 때까지 줄곧 버텨왔다. 내가 '남'들과는 다른, 조금 특별한 사람이라는 생각도 자각하지 못했다. 


'정상적'인 사람들은 텍스트를 읽으면 순간의 분위기와 감정으로 기억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이, 단어 하나 하나의 의미는 알지만 문장을 읽으면 머릿속에 그려내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정상적'인 사람들도 귀찮고 피곤해서 중요한 일을 때로 미룬다. 하지만 본인이 마음만 먹는다면 의지로 실행할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내 인생이 달린 중요한 문제조차도 시작하지 못하고 끝까지 미루는 줄 알았다. 쓰고 싶은 내용의 수필을 마무리 하는데 1년 넘게 걸리지 않는다.

습관적으로 자기혐오와 자기 모멸의 늪에서 허우적 대지만, 겉으로 티만 안내는 나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러는 것은 아니다. 


'정상성'에서 벗어나 있던 내가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을 몰랐다.

부모님도 선생님도 친구들도 알아채지 못했다.

내가 공부 잘하는 모범생이었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면 '모범생'은 아니었다. 초6 선생님이 나더러 '공부 잘하는 애의 편견을 깨준 학생'이라고 말한 것을 보면 확실하다. 7년 다닌 학원의 영어 선생님은 나더러 본인 강사 생활에 딱 두 명있는 '연구 대상'이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그 누구도 내 정신에 문제가 있다거나, ADHD라던가, 정신적 치료를 권장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3년 내내 전교 일등, 학원에서 수학이든, 영어이든 독보적인 일등이었다.

사람들은 그냥 좀 특이하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Self regulation이 병적으로 부족한 adhd의 단점을 그대로 갖고 있던 나는 중요한 학교 내신 기간 중 한 주는 아예 공부안하기 일쑤요, 공부를 했다 안 했다 반복했다. 고등학교 시절 내내 나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공부를 안 하는 것'이었다. 주변에 말하면 부모님도 친구들도 선생님도 재수 없다고만 한다. 정확히 말하면 '공부를 안 하는 것'이 아닌 '공부를 계획하고 시작하고 실행하는 능력이 극도로 낮은 것' 즉 비정상적으로 낮은 실행기능이었다. 성적은 잘 나와도 그 과정은 내게 고통이었다. 글을 5분이상 쓰거나 읽으면 과도로 내 양쪽 머리를 찌르고 휘젓고 가르는 고통이 느껴졌다. 때로 분출하는 흥분을 가라 앉히지 못해 교실에서도 심화반에서도 과잉행동을 일삼았다. 심장이 터질 듯한 고통을 안고. 대인 기피증은 기본으로 쭉 달고 살았기에 고1때까지 친구가 한 명도 없었다. 고2때부터 우연히 친구들과 사귀고 대화함의 행복을 느끼고 사람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가 일말이라도 관심이 없거나, 배경지식이 없는 주제의 대화만 나오면 맥락도 내용도 파악하지 못했다. 그런 대화는 안개로 뒤덮힌 미로에서 헤매임으로 비유가 가능하다. 부족한 작업기능능력으로 드러나는 난독증은 청각에서 더 두드러졌다. 보통 친구와 오래 대화하면 난 들어주는 스타일이었다. 왜냐고? 이해를 못하니까 듣는 척만 하는거다. 


내가 왜 이렇게 공부를 안 하는 걸까 아버지께 고민상담을 하면 네가 절박하지 않아서, 네가 너무 기준이 높아서라고 하신다. 

이유는 그게 아닌데. 분명 큰 문제가 있는데. 나 빼고 주변 모든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타인과 나의 세상은 단절되어있다.

수능에서 4개 틀렸다. 상위 1%정도 되려나. 온 집안이 경사였다. 서울대, 그중에서도 상당히 높은 과에 합격했다.


대학 입학 후 1년 간은 펑펑 놀았다. ADHD 문제가 껴들 겨를이 없었다.

문제는 내가 뭔가를 하려고 할 때. ADHD의 비극은 의지를 가지고 무엇인가를 하려할 때 시작된다.

연애를 시작했다. 동아리에서 중책을 맡았다.

우울증과 불안, 공황이 다시 시작되었다. 

사람의 인생과 인생이 만나는 연애는 내게 다시 지옥같은 삶이 시작되게 했다.

여친의 잘못이 아니라, 원래 나의 인생은 지옥이었기에.

나만 홀로 쇠창살 안에서 고문받으며 돌아다니는 기분이다.

여친도 편하지가 않다. 불편하다. 여친과의 대화가 이해가 안된다.


여친은 떠나갔다. 바람펴서. 인간에 대한 공포로 한 학기동안 떨었다.

ADHD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한 블로그를 통해 알게 되었다. 난독증과 집중력이 극도로 낮은 나였기에, ADHD일 지도 모른다는 느낌만 받을 뿐 확실한 근거를 말할 순 없었다. 

수개월이 흘러 CAT 검사를 받았다. 

ADHD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신다. 

꾸준히 약물 치료를 받다가 콘서타를 만나면서 광명을 찾은 기분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이렇게 사는 구나... 글이 읽힌다는 것이 이런 기분이구나.

대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평범함이 기적임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내 인생은 다시 시작되었다. 생전 처음으로 희망을 갖게 되었다. 소속감을 느끼고 사람과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의 즐거움을 이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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