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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없는 일들과 하지 않은 일들
Level 3   조회수 137
2022-06-02 12:26:51

1. 의지부정과 능력부정

내가 adhd일 수도 있을지 고민하는 중에 가장 큰 물음은 이것이었다. 나는 안 하는 것인가, 못 하는 것인가?

나는 100m 거리를 5초 안에 뛰지 못한다. 나는 트럼프카드 52장의 배열을 5분만에 외우지 못한다. 나는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하지 못한다. 이것들은 너무 당연하다.

그렇다면... 나는 과제를 시작하지 못한 것일까, 시작하지 않은 것일까? 나는 수업시간에 졸음을 참아내지 못한 것일까, 참지 않은 것일까? 미치도록 재미없는 암기과목 시험 공부를 전날까지도 시작조차 하지 못한 것일까, 시작하지 않은 것일까?

안 한다, 의지부정. 못 한다, 능력부정. 사실 의지나 능력이나 부정하는 게 썩 내키지는 않는다.

2. 괴로움과 면죄부

내가 못 하거나 안 한 것들에 대해, 나는 항상 괴로워했다. 과제를 잘 하고 싶으면서도 미루다가 마감 직전에 얼렁뚱땅 해서 겨우겨우 제출하고, 거기에 뒤늦게 떠오른 좋은 아이디어들을 하나도 포함시키지 못한 것이 괴로웠다. 존경하는 교수님의 좋아하는 수업에서조차 종종 맥없이 졸아버렸고, 그 뒤에 남은 알아볼 수 있을 듯 없을 듯한 형편없는 필기를 보는 게 괴로웠다. 싫어하는 과목이라 해서 시험 당일 전날까지 책을 펼치지조차 않은 것이 부끄럽고 괴로웠다.

문득 든 생각, 나는 괴로움을 면죄부로 쓰고 있는 것일까?

난 이걸 못 해서 괴로웠어. 내가 일부러 스스로를 괴롭게 만들 리는 없잖아? 그러니까 이건 내가 선택한 게 아니었어. 안 한 게 아니라 못 한 게 맞아. 어쩔 수 없었던 거야.

...물론 내가 못 한, 아니면 안 한, 수많은 일들 중에는 정말로 나의 선택권 밖이었던 것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인간이고, 인간의 능력치에는 분명 한계가 있으니까.

그런데 어쩌면 나는, '못 한 거니까 어쩔 수 없었다'라는 면죄부를 받기 위해서, 일부러 내가 못/안 한 모든 일에 대해 불필요한 괴로움을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나를 괴롭히고 있었던 건 아닐까?

앞으로 내가 못한, 혹은 안한 것들에 대해 너무 괴로워하지 않으려 한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더 많다고 믿고 싶다. 가끔은 바람직하지 않은 선택을 할 수 있고, 그래도 괜찮다. 인간은 원래 완벽하지 않으니까. 한 번 잘못 선택했다 해서 다음에도 계속 그러리라는 법은 없다. 다음에는 올바른 선택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의지부정을 피하기 위해 능력부정을 택하는, 능력을 희생양 삼아 가두는 짓을 이제 그만두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못했던 일이라도, 다음에는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떤 날은 렛잇고를 부르면 삑사리가 나지만, 어떤 날은 안 나기도 한다. 한 번 못했다고 다음에도 못하리라는 법은 없다.)

3. 최선

최선을 다했으면 됐어, 라고들 한다.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못 하는 건 빼고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면 확실히 최선을 다한 거겠지. 근데 못 하는 게 대체 뭔데? 그걸 모르니 최선이란 말도 모호하게만 느껴진다.

전에는 최선을 다했다는 말을 함부로 쓰지 않았다. 후회되는 점이 많았으니까. 그런데 이젠 그냥 내가 매 순간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하련다. 나는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고 있다. 종종 해야 할 일을 안하거나 못하지만. 가끔은 '최선이 겨우 이거야?' 싶을 때도 있지만.. 항상 그정도에 머무르는 것은 아니니까. 나의 최선은 때로는 볼품없고, 때로는 근사할 것이다. 나의 볼품없는 최선까지도 사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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