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앱의 블로그 글은 보기만 했지, 직접 쓰는 것은 처음이다. 나같은 실수투성이 우당탕탕이, 과연 ADHD에 관해 쓸 자격이 되는지도 의심스럽지만 궁금하긴 하다. 분명 성인 ADHD의 진단과 치료는 예년에 비해 증가하는 추세라 하던데, 왜 내 주변에는 없을까? 수천 건의 통계의 주인공들은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오늘도 움츠리며 좌절하고 있을까. 아니면 당당하게 자신을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있을까. 나는 그 중간에서 어찌저찌 견뎌내고 있다. 성공보다는 실패에 가까운 ADHD인의 삶을 살아서 자랑할 건 없지만, 이때까지 살아온 여정을 대략적으로나마 풀어내보려 한다.
나는 어려서부터 주의력 우세형 ADHD 증상을 보였지만 그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다. 지금도 ADHD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나라이고, ADHD 자체가 남성 중심적으로 연구된 측면이 많음을 알기에, 1n년 전 여성 청소년으로서, ADHD 진단을 받기가 하늘에 별따기인 줄은 안다. 하지만, 요즘 금쪽같은 내새끼와 같은 프로그램을 보고 있노라면, 저런 프로그램이 내가 어릴 적에도 있었다면 진작에 adhd 진단을 받고 약물을 복용하고 (넉넉했다면) 인지행동치료를 받으며, 스스로를 덜 자책하며 살 수 있었다는 희망찬 가정은 괜한 억울함과 뒤섞여 사라지지 않는다.
오늘도 금쪽같은 내새끼를 보았다. 시지각이 또래들에 비해 덜 발달한 여성 청소년이 겪는 일상생활의 어려움을 담은 회차였다. 그 아이의 생활을 보는데, 어릴 적 나의 모습과 많이 닮아 보면서 속으로 울었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하는지 몰라, 눈치가 없다는 말을 수없이 들어야 했던 청소년기의 나와 마주쳤다. 그때의 나는 눈썰미도 좋지 못하면서 주변에서 하는 걸 부주의하게 곧이곧대로 따라해서, 야단을 사서 들었는데,, 그나마 금쪽이에겐 오은영 박사의 예리한 진단과 금쪽이를 돕기 위한 따뜻한 가족들이 있어 다행이었다. 오은영 박사님의 지도와 부모님의 노력으로 시지각과 상황 대처 능력을 키우는 금쪽이의 모습을 보니, 나도 돈을 모아 인지행동 치료를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대학생이지만 아르바이트를 장기적으로 해본 적 없다. 제일 긴 게 3개월 공기업 계약직 아르바이트였고, (그 아르바이트에서도 실수를 너무 많이 해 주변 동료들에게 핀잔을 많이 들었다. 더 이상의 민폐가 되고 싶지 않기에, 이를 계기로 절대 조직/사무직에는 발도 들이지 않겠다 다짐했다.) 그 외에는 2주~1달의 단기 아르바이트가 전부다. 친구들로부터 왜 이렇게 알바를 안 하고 게으르게 사냐고 핀잔도 들었다.
입밖으로 내뱉을 순 없었지만, 나는 대학교 다니기도 버거웠다. 대학과 일을 병행하며 본인 용돈을 스스로 버는 친구들과 달리, 나는,, 겨우 성적 맞춰 온 대학의 재미없는 전공 공부를 하기도 버거웠다. 정확히는, 18학점 수업 듣는 것도 버거웠다. 그것도 힘들어, 수업 시간에 많이 졸았다. 신체적으로 약한가 싶어 주3회 이상 헬스도 꾸준히 하고 있지만 날마다 솟아나는 근육과 달리 콘서타를 먹어도 원체 없던 집중력이 갑자기 솟아오를 리는 없었다. 다만 덜 졸기는 한다.
나는 즉흥적인 인간이었다. 삶의 대부분을 순간적인 충동으로 연명해왔다. 과제도 하루 전이나 당일에 시작해서 몇 시간 전에 아슬아슬 제출했다. 이 정도면 다행이지, 뻔뻔하게 당일에 시작해서 제출 기한을 놓쳐 다음날, 다다음날에 내는 경우도 허다했다. 온라인으로 과제를 내는 수업들이 아니었다면,, 학교에서 제적될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다행히 코로나 학번이어서, 학점 버프를 많이 받아 성적은 썩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이런 애매한 내가 요즘에 하고 싶은 게 생겼다. '편입'. 현재 다니는 대학은 흔히 지거국이라 불리는 저렴한 학비의 국립대이다. 원해서 온 건 절대 아니고, 재수를 했음에도,, 수능에 또 미끄러지고 하향으로 낸 수시만 붙어서 어거지로 왔다. 원래 지방에서 살아서, 다른 지방에도 살아도 괜찮을 줄 알았다. 그러나 200만대 인구의 도시와 100만대 인구의 도시는 같은 지방이라도 삶의 질이 천지차이였다. 제대로 된 친구가 없다는 문제는 둘째치고, 대학 주변에 어떤 인프라도 형성되어 있지 않았고,, 학교 시설도 전반적으로 열악했다. 기숙사가 가장 최악이었다는 점도 학교에 대한 마음이 떠나간 주요한 계기였다. 방에 누수 흔적과 곰팡이들이 곳곳에 방치되어 있었는데, 행정실에 말해도 조만간 수리할 거라며 아무런 조치를 취해주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곰팡이들만 대충 닦아 살고는 있는데 하루하루가 끔찍할 수도 있다는 느낌을 매일 갱신 중이다.
하지만, 나란 인간이 편입이라는 어려운 관문을, 혼자? 준비할 수 있을지 확신이 안 서 계속 최종 결심을 미뤄왔다. 하루에 열 몇 시간 씩 공부할 능력이 내게 없다는 것도 문제였다. 누워 있을 수는 있지만, 앉아 있는 건 힘들었다. 콘서타를 먹고 다른 세계를 경험하고 있다지만, 여전히 집중력이란 내가 더 원하는 순간에도 쉽게 사라져 버리곤 했다.
그래도, 하루에 3시간 이상은 편입 공부 중이다. 올해가 아니면 내년이라도, 서울권 근처라도 가는 게 소망이다. 당연히 다른 이들의 공부량에 비하면 턱도 없지만, 이것도 나에게는 최선 아닌 최선임을 안다. 안 하는 것보단 낫겠지?라는 마음으로 진행 중이다.
나의 최종 꿈은 N잡러이다. 말은 거창해 보이지만, 사실은 한 직업에 오래 종사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불안감이 내재된 것이다. 어떨 때는 드라마/영화 시나리오를 쓰면서, 어떨 땐 독립언론을 운영하면서,, 어떨 때는 여행 콘텐츠를 만들면서, 어떨 때는 산업 디자인을 하면서,, 해보고 싶은 건 많은데 시도해 본 건 거의 없다. 통장에 꼬박꼬박 입금되는 월급의 안정감도 좋아해서, 취직도 하고 싶지만, 조직에 속함으로서 타인에게 폐를 끼쳐야 하는 상황의 아이러니가 너무 싫어 취업과 거리가 먼 쪽으로만 나의 미래를 그려보게 된다. 내가 좀 더 체계적인 인간이 되면 괜찮을까.
정신과 의사 선생님은 내게 매번 스스로를 부정적인 인간으로 그만 바라보라 말씀하신다. 그런 생각이 들거든, 최대한 빠른 순간에 좋아하는 영상이나 노래를 들음으로써 끊어버리라고. 긍정적인 자기 확언의 중요성을 강조해 주신다. 콘서타와 자나팜과 위로와 삶의 조언을 모두 얻으러 간다는 점에서, 아직까지 정신과는 굉장히 유용하고 위안이 되는 곳이다.
올해의 목표는 자기 효능감을 높이는 것이다. 생존 그자체를 기특해하는 순간을 넘어, 현재 하는 공부나 해야 할 일들에 충실함으로써 얻는 성취감에 기쁨을 느끼며, 삶의 이유를 되새겨보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