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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여워 하라는 말.
Level 2   조회수 128
2023-07-27 00:28:54

부모 상담을 할 때에 들었던 말.

연민도 사랑이며,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가엽게 여겨도 괜찮고, 심지어 필요도 하다는 말. 


아이들 진료를 볼 때에 들었던 말. 

자신을 가엾게 여길 수 있을 때 까지, 더 힘내보자는 말. 


그 말들이, 그리고 그 말을 뱉을 수 없던 마음이 요즘 자꾸 머릿속에 맴돌아 그 것에 대한 마음을 남겨요.


그 말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지는 않았어요. 


가엾게 여기고자 한다면 한없이 가여운 것이, 나의 인생일 수도 있겠고 

그 인생에 연민을 느끼고, 도닥 도닥 위로할 수 있는 유일 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나였을 테니까요.  


아, 그런데 저는 왜 병적으로 그 것이 싫었는지.


저는 참 잘 살아왔어요.

본인의 삶에 자부심을 느낄 정도로 말이에요. 

공부를 잘 한 것도, 돈을 많이 벌고 있는 것도 아니지만요. 


하지만, '살아' 있게 되기까지 나는 참 부단히 삶과 싸웠고, 말 그대로 생존했으니까요. 


그게 내가 살아온 평범한, 삶이니까요.


하지만 사람들이 하는 말이 무엇인지 모르지는, 않아요. 


내가 놓치지 않았어도 되었던

내가 놓쳐버린 무언가. 

내가 놓쳐버린 사람들. 

내가 놓쳐버린 시간들. 


 

모를까요.  


별 만큼 많은 자책을, 별 만큼 많은 미안함을 가득 담고 담아 넘쳐흐르던 밤들이,

내가 너무 버겁던 이 하루 하루의 무게가 

사실 세상 누군가 단 한번도 느껴본 적도 느낄 필요도 없던 무게란 사실을. 


이제 와서는 모를 수가 없지요.


병 이전에 가난에서 묻어온 감정. 

하, 그것도 우리 아버지의 병 때문이었다니  

모든 것을 ADHD의 탓으로 돌리고 원망하고 화내고 싶은 마음이 왜 없을까요.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마음, 

지켜오고 애써온 나의 삶이 초라해지는 마음에

뱉을 수 없던 말이겠죠.



하지만 말이에요. 그걸 아는 지금도

나는 오늘도 기어이 그 말을 뱉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나의 병 때문에 가여운 사람이라면, 

그럼 대체 나의 빛나는 저 아이들은 어떤 사람이 되는 것일까요. 


누군가 가족들과 놀이 공원에 가던 그 하루가,  

누군가 산타 할아버지가 두고 간 선물에 행복해 하는 착한 어린이가 된 그 하루가, 


나는 가질 수 없던 하루였지만,  


세상이 말하는 '착한' 어린이는 될 수 없었지만, 

전기가 끊겨도 가로등 불빛이면, 책은 읽을 수 있었고 

짝꿍 잃은 전집들, 군데 군데 찢기고 이 빠진 헌 책들이 

그 시절에 기꺼이 나를 그들의 짝꿍으로 받아주었던 경험. 


그 때에 읽었던 책들이 

놀이동산보다도 더 먼 곳으로 나를 데리고 가 주었던 경험.

나에게는 그런 경험과 그런 짝꿍이 있어요. 


그건 나만 가질 수 있는 경험-.



비 오는 날 집에 찢어진 우산 밖에 없어서 못 쓰고, 

우산을 챙겨 가는 것을 까먹어 못 쓰고. 

우산을 챙겨 주는 이는 없었지만,


물 웅덩이에 생긴 무지개들의 움직임을 바라보고 행복해 하던 하루.

구름과 구름 사이, 비가 덜 오는 곳을 고민하며 찾아 헤매던 하루. 


그 날 혼자 걷던 그 길은 돌이켜 보면 

남몰래 구름과 춤을 추는 시간이었고,


그건 나만 가질 수 있는 바보 같고 동화 같은 날들이죠. 



내가 나의 병을, 나의 삶을 가엾게 여긴다면  

나는, 그 날들을 어떠한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걸까요. 


그건 돌이켜 보니 그냥 나의 평범한 날들이었어요.



그래요, 어제도, 오늘도, 

아직도, 


삶이란 파도는 

이유 없이 밀려와 나를 버겁게 해요. 


나는 여전히 물 속에서 숨을 쉴 줄 모르고, 헤엄치는 것이 서툴러요.

아직도 가끔은 이리 쿵 저리 쿵 부딪히곤 하죠. 


미안해요. 

그대들이 부딪혀 올 때 손잡고 춤 춰줄게요.


하지만, 가엾게 여기지는 말아주세요.


걸음마를 배우는 아가들을 가엾게 여기지는 않잖아요.


나는 물 밖에서 숨을 쉬는 돌고래라는 것을 조금 늦게 깨달았을 뿐이니

내가 물 속에서 숨을 참는 것을 가엾게 여기지 말아주세요.


나 역시, 물 속에서만 숨을 쉬는 그대들을 가엾게 여기지 아니하니.


우린 각자의 평범한 하루를 춤추며 살아가면 안되는 걸까요...?


피차 거센 물살 앞에서는 속절 없는,

가엾다면 한없이 가여운 존재 들 아니겠나요.


하지만 나의 삶이 그러하듯, 

그대들의 삶 또한 감히 가엾다는 말로 다 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은, 아름다움이 있다는 걸


나도, 그대들도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러니 나는 가엾지만 가엾지 않은, 삶을 살기로 오늘도 마음먹어 볼게요.


그래서 나는 오늘도 


부디 내가 나를 가엾게 여기는 것에 안주하지 않고, 

숨을 쉬기 위해 물 위로 오를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기를.


부디 내가 다른 이를 함부로 가엾게 여기는 실수를 범하지 않기를.


그저 누군가 멈추어 우는 이가 있다면, 

그 눈물이 지난 자리에 피어날 꽃 한 송이를 

진심으로 바래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가엾다는 말을 대신 하여 마음 속에 되새겨 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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