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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이라는 구원 2
Level 8   조회수 179
2018-12-26 13:48:26
 

 

그 당시, 빠져나갈 구멍은 이것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제와는 다른 사람인 척 하는 것,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는 것.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그렇게도 열등하다는 것은 말이 안되었다. 감정을 배재하고 이성적으로 판단하려 애썼다. 보자. 나는 머리도 나쁘지 않고, 턱없이 이기적이거나 무례하지도 않다. 용모가 흉물스러운 것도 아니고, 냄새가 나거나 하지도 않다. 그렇다면 나는 필시 열등한게 아닐거다.

그러길 4-5년, 옷장에 쳐박아두듯 외면해왔던 것들이 기어코 와르르 쏟아져 나를 덮쳤다.

나는 뭔가 다르다. 더 이상 이 사실을 외면할 수 없다.

엄마는 아니랬다. 난 멀쩡하다고, 노력하면 충분히 된다고. 엄마는 그 말이 여태까지의 내 삶에 대한 끔찍한 모욕이며 앞으로 살 삶에 대한 저주라는 걸 모르겠지.

암흑 속을 수년 간 더 구르고 나서야 나에게 지팡이같은 진단서가 주어졌다. 물론 남들에게는 안 보이는 지팡이다. (내가 알리지 않는 한 말이다.)

구원이란, 메디키넷이 아니라 의사선생님의 공식적인 인정, 즉 진단 그 자체였다. 

나 뭔가 힘들어, 라는 설득력 없는 나의 말 대신, 나보다 훨씬 설득력 있는 사람이 대신 얘 뭔가 힘들어요, 라고 말해준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큰 안도감을 주는지 다른 이들은 모를 것이다.

"나는 머저리야", 라는 절망감과 패배감으로 차있던 머리 한켠에, 전두엽과 도파민과 노르에피네프린이라는 어지러운 단어들이 포함된 과학적인 설명이 대신 채워졌다. 나는 머저리가 아니고 adhd다. 나는 머저리가 아니고 adhd다. 나는 머저리가 아니고 adhd다.

광명을 찾았다고까지는 못하겠지만, 최소한 암흑은 아니다. 약을 먹으면 흐릿하게나마 이것저것이 느껴지고, 그에 따라 약간 더 적절함에 가까운 말과 행동을 할 수 있다.

그 모든 것에 과학적인 이유가 있었다. 한심한 옛날 일을 말해도, 의사선생님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그것은 adhd의 결과라고 말한다.

물론 구원이 되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엿같은 시절을 보냈고 또 보내는 중이니까 🙂

 

 

***

구원받은 (그러나 그다지 영광스러운 날들을 보내고 있지는 않은) 우리, 그리고 곧 구원받을 사람들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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