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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의 『대화』
Level 4   조회수 37
2018-12-14 14:53:28
#1. 나는 졸라 몰입하는 편이다. 해야 할 것에 몰입하면 좋은 일이지만 몰입의 대상을 조절하지 못하니 때론 재앙에 가깝다. 나는 저주하며 휴대폰을 부쉈고, 컴퓨터도 독서실에 두고 다닌다. 그리고 어제 자기 전에 잠깐 읽고 잔다는 것이 500페이지가까이 읽어버렸다. 리영희의 『대화』다.



▲덕분에 오후 2시가 가까운 지금에서야 독서실에 오고 말았다.

나무위키 리영희 문서 https://ko.wikipedia.org/wiki/%EB%A6%AC%EC%98%81%ED%9D%AC

#2.
어째서 이 나라에서는 인간말살의 범죄가 ‘공비’나 ‘빨갱이’라는 한마디로 이처럼 정당화 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그 후부터 머리를 떠나지 않게 되었다. 이것은 내가 이데올로기의 광신(狂信) 사상과 휴머니즘에 대한 멸시를 깨쳐야겠다는 강렬한 사명감 같은 것을 느낀 계기가 되었다.

 

독서실에 와서 살짝 검색해보니 과연, 예상대로 우익 유튜버님들께서 「종북좌파의 대부」 칭호를 하사하셨더라.
과연 아래 글을 보면 그럴 만도 하다. 그럼 루쉰은 종북좌파의 대할아버지겠네?
 

“빛도 공기도 들어오지 않는 단단한 방 속에 갇혀서 죽음의 시간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벽에 구멍을 뚫어 밝은 빛과 맑은 공기를 넣어주는 것이 옳은 일인지 아닌지를 궁리하면서 고민하는 상황의 이야기가 있다. 방 속의 사람은 감각과 의식이 마비되어 있는 까닭에 그 상태를 고통으로 느끼지 않을뿐더러, 자연스럽게까지 살아(죽어)가고 있다. 그런 상태의 사람에게 진실을 보는 시력과 생각할 수 있는 힘을 되살려줄 신선한 공기를 주는 것은 차라리 죄악스러운 일일 수도 있지 않느냐 하는 말이다.”

 

#3.

사실 이분이 막연한 소위, "종북"인지는 잘 모르겠다. 읽은 책도 고작 이 한 권 뿐이므로.
다만 대담자인 임헌영 씨가, 6.25때 북의 남측 침공에 대해서 "남측 책임론"을 제시하자,
밝혀진 사실(구소련 비밀문서 등)을 생각에 맞춰 부정해서는 안 된다며 마구 후드려팬 부분이 있어서,
6.25가 남의 북침이라던가 하는 쪽까지는 분명히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겠다.

이전 세대에 비하면 민중의 민중 스스로에 대한 혁명이라는 점에서 몇몇 국가들의 공산화를 옹호하긴 하는데
(베트남이라던가) 글쎄 그게 종북이라면 나도 잡혀가야겠지?

#4.

종북좌파의 대부신지, 사상의 은사신지, 둘 다신지, 둘 다 아니신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로서는 읽고 힘이 되는 책이었다. 한마디 한마디가 내 별것아닌 과거의 상처에 연고를 발라주는 기분이었다. 특히 군대에 대해서는 나만의 뒤틀린 생각이라고 생각했던 것과 기쁘리만큼 일치하는 구절도 있었다.

국정농단 이후로 여론이 바뀌었지만, 국정농단정도는 정말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무수한 짓을 저지른 것이 이 나라의 군대며 우익이어서, 나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늘 참 외로웠다. 하나의 행동이 다른 행동과 비슷하며, 그 다른 행동이 다시 천인공노할 무언가와 비슷한 경우가 많았다. 그런 감각이 일상생활에도, 회사에도 많이 남아있어서 나는 매번 나만 느끼는 그 바늘에 찔리면서 힘들었다.

단순히 정치적인 부분에서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내가 느낀 군대라는 것의 본질적 속성에 대해서도, 현대의 기업에서부터 엑셀의 사각형에 이르기까지 '이상하다'고 느끼는, 집단에서의 인간 행태에 대해서도 나는 내 친구 윤모씨와 공감하는 몇몇 부분을 제외하면 늘 혼자였다. 유난히도 시스템에 불만적이었다. 늘 상식 바깥이었다. adhd여서? 그래서 그런 부분도 있겠지만 내가 나라는 인간이어서 그런 부분이 더 컸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이렇게 오만한데 adhd가 아니었다면 얼마나 더 멋대로 말하고 떠들어댔을지 모르겠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가령 어렸을 때 <호국영령에 대한 묵념>이 죽어라고 싫었는데, 영웅이랍시고 고고하게 치켜세우고 신성시하는 것은 그들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 중 얼마나 '기쁘게' 죽어갔을까. 기어코 그 행사에서도 반공 한마디는 기어코 끼워넣어서는. 차라리 한바탕 눈물이라도 흘려주는 게 어떨까 싶었다. 감사도 좋지만 비참한 죽음에는 애도나 통곡이 더 어울리는 법이니까.

죽음을 불사하고 기뻐하는 애국심은 정말 처참한 것이다. 감사할 만한 것이 못 된다.
하물며 '나도 전쟁이 나면 이 땅을 지켜야지'따위의 치기보다는 '결코 이 땅에 전쟁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가 올바른 결론이다. 이 당연한 이야기가 삐딱한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가 겪은 군대에서는 버젓이 '광주 폭동'따위의 교육을 했고, 친구들은 "군대에 있다 보면 우파가 될 수밖에 없다."같은 헛소리를 했다. 사회에 나와서도 마찬가지였는데, 미국과 소련의 대리전을 치른 끝에 군인보다도 민간인 사망자 수가 많은 비극을 겪고도 많은 사람들에게 군대나 전쟁은 민족의 부끄러움이나 슬픔이기보다 자신의 유능함을 입증하는 입담 수단이었다.


 

다만 이번 정권에 와서 느낀 변화가 있는데, 그런 행사를 할 때, 감정의 비중을 "자랑스러움"보다는 "슬픔"에 둔다는 것이다. 너무 감격스러웠다. 정말로 감격스러웠다. 이제야 마음이 좀 편안했다.

2002 월드컵도 혐오스럽기는 마찬가지였는데, 그때 분위기에서 한국인이 한일전에서 일본을 응원하는 것이 거의 뭐 정서상 폐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이나 대리전쟁으로서의 스포츠나 혐오스럽기는 마찬가지다. 화는 자기방어를 위한 감정이다. 내부를 단순화해서 결속시키고, 외부를 단순화해서 극단적인 악으로 치부한다. 그렇게 사람을 멍청하게 만들어서, 감정의 힘을 자신들을 위해 쓰게 하는 것이 여태 정치가들의 작태 아니었나? 한국을 응원하는 것도 좋고, 일본을 응원하는 것도 좋다. 그게 그런 식으로 열려있어야 자연스러운 스포츠며, 대리전쟁이 아닐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반일감정은 인간의 인간을 향한 만행에 대한 분노여야지, 어떤 자존심의 회복이나 복수따위여서는 한없이 가벼울 뿐이다. 나는 영화라면 명량보다는 남한산성이 좋다. 교수님 한 분이 전자를 보고 "포르노"라고 하셨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5.

리영희 씨가 하시는 말씀이 회색의 내 사견 부분과 많이 일치했다. 그게 전쟁을 겪은 사람의 당연한 상식이라고 생각한다. 나만 그렇게 삐딱했던 것도 아니고, 그런 것에 불편을 느끼는 것이 이상한 일도 아니라는 것이... 너무나도 나에게 위안이 되었다. 혼자서 책을 읽는데도 여럿이 있는 기분이었다.

혼자가 아니라는 정도가 아니지. 나는 지금 그렇게 피로 나아져 온 사회에 살고 있으므로.
조만간 돈이 생기면 『전환시대의 논리』도 찾아서 읽어봐야겠다. 아직은 어떤 사람인지 확신할 수 없다.

▼읽는 도중에 주요한의 여적필화사건 지문이 나왔다. 늘 근현대사 시험 문제로 접하다 이렇게 보니 감격스러웠다.
“문제는 그처럼 투표자가 자유로이 자기 의사를 행사할 수 있는가에 달렸다. (…) 인민이 ‘성숙’되지 못하고 또 그 미성숙사태를 이용하여 가장된 다수가 출현된다면 그것은 두말없이 ‘폭정’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니 (…) 가장된 다수의 폭정은 실상인즉 틀림없는 ‘소수의 폭정’이라고 단정할 것이 아닌가. 한국의 현실을 논하자면 다수결의 원칙이 ‘관용’ ‘아량’ ‘설득’에 기초한다는 정치학적 논리가 문제가 아닌 것이요, 선거가 올바로 되느냐 못 되느냐의 원시적 요건부터 따져야 할 것이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601222108485#csidxa474a01bcb982ddb860b1c757067f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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