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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늦어져도 괜찮아.
Level 2   조회수 30
2018-01-02 19:51:13
얼마 전부터 난 달팽이를 좋아하게 됐다.

(에이앱 송년회 때 만난 꿈달님의 영향인 것 같다.. ㅋㅋㅋ

꿈달님 진챠 너무 귀여우심... ^^)

누군가는 촉감 때문에 징그럽다고 할지도 모르고,
다른 누군가는 움직이는 속도가 너무 느려서
보고 있으면 답답하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난 그래서 달팽이가 더 좋았다.
그 달팽이가 꼭 나같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자기 스스로는 정말 끊임없이 움직이려고 노력했고,
자기 딴에는 정말 장족의 발전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는 '그것도 움직인 거냐'며 비웃을만큼
느려도 너무 느린 달팽이.

그리고 외국어에서 발휘하는 능력이 10점 만점에 15~20점이라면
다른 부분에서 발휘하는 능력은 0.5 내지는 1 밖에 안 되는 나.
툭하면 실수를 하고, 뭔가를 흘리고 오고, 멍때리고
굉장히 중요한 일이었는데 까먹는 일은 일상 다반사고.

그래도 뭐 어떡하겠나. 뇌구조 자체가 남들이랑 다르게 태어나 버린 걸.
그렇다고 날 낳아주신 부모님을 탓할 수는 없잖아.














우리 나라 사람들은 특히나 다른 이들의 변화의 속도에 민감하다.
저 사람이 뭔가를 가지고 있으면 나도 그걸 하나쯤은 가지고 있어야 하고,
남들이 다 가지고 있는데 안 가지고 있는 뭔가가 있으면
넌 왜 없냐며 주변에서 닥달하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뭔가 시대의 흐름에 뒤쳐진 옛날 사람이라며
'원시인'이라는 별명을 갖게 되기도 한다. 의도치 않게.


누군가에게 뒤쳐진다는 느낌을 받는 걸 정말 못 견디는 사람들은
그 변화의 속도에 맞추기 위해서 늘 고군분투하고,
나 혼자 낙오되지는 않을까라는 걱정을 하며 매일 아등바등 살아간다.

나 역시도 대한민국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으로서,
남의 눈을 아무리 의식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완전히 그들의 눈에서 자유로울 순 없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궁금해졌다.
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시선과 그들의 속도에 맞춰 살아야 하는 건지.
다른 사람들이 보기 좋으니까 내 적성에는 맞지 않아도
남들이 봤을 때 "우와!" 라는 감탄사가 나올 만한 곳에 다녀야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뒤쳐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누군가 자신보다 뒤쳐졌다 싶으면
'낙오자' 내지는 '인생 실패자'라며 낙인을 찍고,
뒤에서 수군거리거나 이상한 사람으로 몰아가기도 하고,
때로는 절대 어울리지 말아야 할 사람,
내지는 투명인간 취급을 하기도 한다.





















좀 많이 늦었지만 최근 들어 ADHD 진단을 받고
그와 관련된 치료를 하고 있는 나는
치료를 하면서 깨닫게 된 게 몇 가지 있다.
나와 다른 사람들 사이의 '차이'라는 걸 인정하게 된 것,
그리고 다른 사람들로부터도 완벽을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차이(差異): 서로 같지 아니하고 다름.

이 세상에 동일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일란성 쌍둥이라 하더라도 성격도 말투도 조금씩 '다르다'.
5천만 한국인도, 전 세계 70억 인구도 마찬가지다.
생김새도, 성별도, 피부색도, 종교도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를' 뿐이다.
방금 언급한 것 중 어떤 것도 '틀린' 건 없다.
'틀렸다'는 말은 정답이라는 게 명확히 존재하고
그 기준에서 벗어났을 때 그렇게 얘기하는 거니까.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다름'을 '틀림'과 같은 뜻으로 해석하는 사회 분위기가 난 참 불편하다.

모든 사람들이 다 각자 다르게 태어났는데
왜 그걸 남들의 기준에 접목시켜서 판단을 '당해야' 하고,
왜 남들의 시선 때문에 정해진 기준에 맞춰서
마치 그 방법만이 정답인 것처럼 살아야 하는 건지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는 건데.
그런 기준을 정해준 사람들이 내 인생을 대신 살아주는 것도 아니잖아.

완벽(完璧): 결함이 없이 완전함.

세상에 결점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모든 사람에겐 각자가 가지고 있는 장점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하지만 장점만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다 불완전한 존재이고, 단점이나 결점을 가지고 있다.
그 불완전한 존재들이 서로 짝을 찾거나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채울 수 있는 사람을 만나서
그들로 인해 그런 부분들이 좀 더 보완이 되고 완전해지는 것일 뿐.
좀 부족하면 어떤가. 그게 인간인걸.





















나는 남들보다 행동이 느리다.
어떤 일을 할 때 순서를 정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다른 이들에겐 아무것도 아닌 일일 수도 있지만 나에겐 그게 너무 어렵다.
남들의 뇌는 그 때 일을 하고 있지만 내 뇌는 일을 안 하고 놀고 있으니까.
그게 멍때리는 걸로, 어떤 일에 압도되는 걸로 나타나서
남들이 보기에는 일을 안 하는 것처럼 보이는 거다.
ADHD 환자로서, 나도 참 답답하다.


어렸을 때도 남들은 30분이면 끝내는 숙제를 난 2시간 넘게 붙잡고 있었다.
멍 때리고 있는 경우도 일상다반사였고.
엄마가 심부름을 두세 개 시키면 그 중 하나는 꼭 빼먹고 오고,
있던 자리에는 뭔가를 항상 흘리거나 놔두고 왔으며,
하려고 적어놨던 건 적어놨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리고 안 본다.
그래서 메모를 해도 무용지물인 경우가 많다.
물론 요즘은 치료를 받으면서 조금씩 개선되고 있지만.

하지만 좋아하는 일에 과집중하는 능력은 정말 좋았다.
중학교 때, 1년동안 풀어야 하는 난이도 있는 영어문제집을
보름인가 한달만에 다 풀어버리고 난 뒤 더 이상 풀 문제가 없으니까
지금은 내 은사님이 되신 영어선생님을 졸라서
다른 문제집을 선물받아 또 푼 적도 있다.
내 교과과정보다 한참 어려운 내용이 나와도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엄청나게 집중을 했던 기억이 난다.

남들의 기준에서 본다면 나는 느린 사람이 맞다.
내가 좋아하는 분야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래서 왜 그렇게 느리냐며 타박받는 경우도 많았다.
더군다나 내 주변인들은 행동이 엄청 빨랐으니까 비교도 많이 당했다.
지금까지는 그런 내 자신이 참 싫었는데,
이제는 쿨하게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난 느린 사람이라고.
그리고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 각각 다른 것처럼
그냥 뇌구조 자체가 다르게 태어난 것일 뿐이라고.
그래서 남들과는 다른 속도로  살아가는 것일 뿐이라고.
달팽이처럼.





















남들보다 끈기도 없고 금방 지치고 무기력해지는 사람들이
나처럼 ADHD를 가진 사람이라는 걸 난 잘 알고 있다.
남들보다 속도가 좀 늦으면 어떤가.
포기하지 않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속도에 맞춰 걸어갈 때,
난 그들보다는 느리지만 달팽이같은 나만의 속도로 꾸준히 움직여서
작은 것부터 조금씩 내 목표를 이뤄나가면 된다.


그렇게 가다 보면 언젠가는 남들이 봤을 때도
"저걸 저 사람이 했다고? 대박! 저건 아무도 못할 줄 알았는데."
라는 말을 들을 날이 올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남들이 하는 노력의 10배 이상은 해야 할 것이다.

마음먹은 일을 행동으로 옮겼을 때 3일 이상 이어지면 기적이라 하는 우리.
남들과 똑같은 노력을 해서는 절대로 일반인들을 따라가기 힘든 우리.
그래서 남들의 두세 배는 더 노력해야 남들과 겨우 비슷해지고
그들을 넘어서려면 그 이상의 피나는 노력을 해야만 하는 우리.
그런 우리에게 '뼈를 깎는 노력'이라는 녀석과
'수많은 실패를 하더라도 또 일어날 수 있는 끈기'라는 녀석은
성격이 까탈스러워서 친해지기는 정말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친해져야 하고,
그 녀석들과의 우정은 내가 눈을 감는 날까지 평생 가야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비웃고 나에게서 등을 돌린다고 하더라도,
그 두 녀석 만큼은 나를 배신하지 않고,
내가 위기에 처해있을 때 나를 구해줄 것이라는 걸 나는 안다.

그래서 올해는 나 자신과 한 가지 약속을 했다.
다른 건 몰라도, 올 한 해는 그 두 녀석과 가장 친한 친구가 되자고.
그리고 그 두 녀석들과 친해지기 전까지는
주변에서 듣게 되는 비난이나 비웃음에는 귀를 닫아 버리고
내 내면의 소리에 집중하고, 달팽이처럼 내 길만 열심히 가자고.
남들은 내가 하려고 했던 행동을 했는지 안 했는지 모르지만
내가 했는지 안 했는지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나 자신이니까,
최소한 나 스스로에게 만큼은 정직하고 떳떳한 사람이 되기로 했다.
그러려면 올 한 해는 나를 정말 혹독하게 다루어야 할 것 같다.

그러면서도 늘 잊지 말아야 할 따뜻한 말 한 마디.
"괜찮아. 좀 늦어지면 어때. 아직까지 포기는 안 했잖아.
그리고 너만의 속도로 조금씩 움직이고 있잖아.
벌써 이만큼이나 왔는걸? 그럼 된 거야. 포기만 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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