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료를 시작한 지 어느새 2년이 가까워져 간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고, 많은 피드백도 받을 수 있었다. 나의 특성 중 어느 것이 adhd에 기인한 것이고, 그것을 조절하는 방법은 무엇이며 적절한 약제는 무엇인지 등... 인데놀과 같은 베타차단제가 심장박동에 관여하는 베타-1 수용체에만 선택적으로 작용하지 못하고, 베타-2 수용체에도 영향을 미쳐 미약한 천식도 악화될 수 있음을 알았을 때에는 "억까도 뭔 이런 억까가..." 라는 생각을 하며 허탈한 웃음을 내뱉기도 했다.
나 자신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하는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부작용이 아주 미약하더라도 그로 인한 리스크를 이익형량해야했다. 예를 들어 베타차단제의 대용으로 시도한 약제의 경우, 어지럼증으로 인해 낙상사고가 일어날 수 있으니 중단해야했다. 그 어지럼증은 불과 수십초에 불과했지만 복용 중 일관적으로 나타났으니 부작용으로 추측하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이번 상담에서는 이런 시도들의 전환점이 생겼다. 그 이유는 저번 상담 내용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나는 사람 이름을 지독히도 외우지 못한다. 여기서 가장 두려운 것은 상대방에게 무관심하다고 비쳐지는 것이다. 불과 수 분전 소개받은 사람의 이름조차 까먹고, 오래 뵙지 않는다면 재미있게 들은 강의의 담당교수님 이름조차 잊어버린다. 정말 억울하게도 난 상대방에게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이 나와 주고받았던 이야기, 그 속에서 찾았던 특징, 얼굴, 말 습관, 가치관, 교수법 등을 이야기하라면 끝도 없이 해낼 수 있다. 다만 이것들은 그들의 부모가 붙여주었을 이름과 연결되는 맥락은 없을 확률이 매우 높다. 설사 맥락이 있다 하더라도 내가 발견하지 못할 확률이 훨씬 더 높다. 이것이 내가 추론한 '이름못외우는억울한사람'병의 원인이었다.
저번 상담에서는 이를 맥락만들기 훈련으로 해결해보자는 제안이 왔다. 나도 납득할 수 있는 제안이었다. 가끔가다 자신의 이름을 무언가와 맥락지어 소개하는 분들이 계신데, 이 경우는 아직도 까먹지 않거나 조금 고민하면 불러올 수 있을 정도니까. 첫 만남은 어쩔 수 없더라도 다음 모임이 예정되어 있으면, 만남 직전에 카톡방 명부를 보며 사람들의 특징과 이름을 연결시켰다. 프로필 사진이 없어 그것조차 힘든 사람들은 이미 연결된 사람들을 소거하고, 여성 남성 이름을 가늠해가며 추론했다.  이름외우기 똥꼬쇼. 뭔가 외워드리겠습니다
그렇지만 나도 사람이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사람들과의 괴리에 이상함을 느끼고 불안감이 찾아오기 시작한다. 이미 해결했을 터인 인간실격에 대한 의문이 재차 덮쳐온다.
이번 상담에서 이 문제를 다시 언급했다. 이러한 단순 암기는 영어 단어 외우는 것과 비슷하게 반복숙달밖에 답이 없다고 대답이 돌아왔다. 여기서 신경쓰이는 것이 있었다. 난 영어 단어 외우기를 마지막으로 시도해 본 적이 10년도 더 지났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많이 받은지라, 나도 질문이 오면 진지하게 생각하여 답해주곤 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곤란한 질문은 어학이었다. 학부 진학 전 히키코모리와 다름 없던 시기에 탐닉한 드라마, 영화, 음악, 유튜브에서 배운 야매 영어가 전부였고, 이는 전혀 추천할만한 방법이 아님을 안다. 엄청나게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나의 문제풀이방법에 구조따위는 없었고, 단어는 두말할 것 없다.
이런 말을 하자 두 눈이 휘둥그레진 의사의 질문을 받았다. "그러면 삶에서 단순 암기를 거의 하지 않으며 살아오셨다는건가요?" 곰곰히 생각해보니 떠오르는게 없었다. 확증편향을 피하기 위해 그 예시를 좀 들어달라고 했다. 적어도 그 자리에서 나온 것들은 모두 해당하지 않았다.
대답을 들은 의사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의사의 입에서 나온 말은 더욱 가관이었다. 이 정도로 단순암기가 힘들거나 익숙하지 않은 경우는 훈련으로 해결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약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지금까지 쌓아온 부작용 데이터를 토대로 증량을 이어나가는 수 밖에 없다고 했다.
후회는 오늘날 자신에게 주는 피드백이다. 하지만 이것이 과해져 지금의 자신을 집어삼킨다면 오히려 독이 되어버린다. 조금만 더 빨리 알았으면 어떠했을까 하는 후회를 '왜 이제야 알 수 있었는지', '이제 뭘 해야하는지'라는 둑으로 적당히 막아냈다. 사실 그런거 없고 나에게 변화를 줄 수 있다는 기대가 덮어버렸을 수도 있다. 그러면 또 어떤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