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읽으시면 좋습니다. 1편: https://a-app.co.kr/posts/?board_name=wp_posts&order_by=fn_pid&order_type=desc&board_page=3&vid=13512
2편:https://a-app.co.kr/posts/?board_name=wp_posts&search_field=fn_user_name&search_text=%EB%8B%AC%ED%8C%BD%EC%9D%B4&order_by=fn_pid&order_type=desc&vid=13570 3편:https://a-app.co.kr/posts/?board_name=wp_posts&search_field=fn_user_name&search_text=%EB%8B%AC%ED%8C%BD%EC%9D%B4&order_by=fn_pid&order_type=desc&vid=13635 ================================================================================================================ <2018년> 2018년에는 학급 운영이 더 안정되었다. 약 먹고 노력한 보람이 있었다. 물론 오래도록 3학년만 맡았고, 맡은 업무가 무척 적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나를 배려해준 것도 있다. 또한 학교에 행사가 적었던 것도 한 원인이다. 2018년 우리 학급의 아이들은 참 예뻤다. 지금도 그 아이들의 귀여운 모습이 눈에 선하다. 많이 순했던 그 아이들과 나는 아기자기한 추억을 쌓을 수 있었다. 나와 같은 학년 담임을 3년 동안 맡은 선배 교사가 내게 말했었다. 이제 달팽이도 어느 정도 경력이 쌓인 교사의 느낌이 난다고. 그래도 나는 마음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정신을 놓으면 여전히 학급 운영이 엉망이 될 것 같은 느낌. 따라서 매 순간 긴장하며 불안해하는 내 마음가짐은 크게 변함이 없었다. 그러니 주변 교사들이 느끼기에는 내가 편안해 보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정신없었던 3,4,5월이 지나고 나자 나도 모르게 내 마음에서 무엇이 생겨났다. 나도 이유를 몰랐지만 명상과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올라온 것이다. 나는 많이 수동적인 편이어서 누군가 주입하지 않으면 새로운 무엇인가를 성취하려고 추진력 있게 움직이지 않는 편이다. 내 부족한 집중력으로는 학교 공부를 하고 선생이 되어 학교에 적응하는 것만으로도 벅찼기 때문에 새로운 무언가를 할 엄두가 나지 않았고 큰 의욕도 없었다. 초등 교사가 되려고 방향을 잡은 것도 사실 부모님이 오래도록 은근히 주입하신 결과물인 것 같다. 그런데 마음에 여유가 조금 생기자 그들(명상, 글쓰기)가 내게로 왔다. 명상은 그 시절 내가 감명 깊게 읽었던 책 [나는 생각이 너무 많아]에서 추천한 활동이었고, 글쓰기는 어릴 적부터 관심이 있었다. 그 둘은 주변에서 나에게 주입한 적도 없는데 열망하게 된 것이었다. 나는 한겨레 문화센터에서 [100일 글쓰기 모임]을 시작하게 되었다. 백일 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 글을 써서 네이버 카페에 올리는 모임이었다. 나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충실히 글을 썼다. 백일 글쓰기를 완주하며 느낀 뿌듯함은 대학교에 합격했을 때나 취직이 되었을 때와는 다른 빛깔의 감정이었다. 무엇을 했을 때보다 즐겁고 충만했다. 마라톤 선수들이 장시간 운동을 하고 나서 러너스 하이를 느끼는 것처럼, 나는 정신적인 러너스 하이를 느꼈었다. 나는 그 오색찬란한 감정을 잊지 않고 내 기억 저장소에 보관했다. 같은 시기에 마음챙김 명상을 시작했다. 명상은 나를 돌보고 자신을 알아가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지금도 피곤하고 스트레스를 받을 때 명상을 하곤 한다. 내가 글쓰기와 명상하는 것을 가족들은 그다지 달가워하지는 않았다. 우리 가족들은 굉장히 실용적이고 사회 순응형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당시 글쓰기 이야기를 하면서 즐거워하던 나에게 아빠가 한 말이 지금도 또렷이 기억난다. "네가 즐거워하니 아빠도 기쁘다. 그런데 글을 쓰면 돈이 벌리나? 승진하나? 결혼이 되나?" 나는 우리 가족은 내 욕구를 공감하지 못할 것이라고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지만 그게 현실로 다가오니 맥이 빠졌다. 하지만 남자친구는 글 쓰고 명상하고 싶은 내 욕구를 지지해주었다. 그는 독서 모임을 운영했던 사람인 만큼 글을 쓰고자 하는 나의 욕구를 진정으로 이해해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그와의 관계에 더 빠져들었다. 2018년 여름부터 가을까지는 글쓰기, 명상, 남자친구와의 연애로 마음이 충만했었다. 사실 글을 쓰는 게 쉽지 않았다. 내가 좋아서 시작한 일이지만 퇴근 후에 바닥난 집중력을 짜내어 매일 한 편의 글을 써야 하는 것이었으니. 그래서 학교에서 일할 때 더 예민한 모습이 나오기도 했다. ADHD인 내가 소음이 가득한 초등학교 교실에서 집중력이 분산되지 않고 담임교사로서 할 일을 알맞게 해내려면 잔뜩 뇌에 힘을 줘야 한다. 다른 교사와 소통할 정신은 전혀 없다. 백일 글쓰기를 하면서 더 그런 경향이 있었다. 나는 사방팔방으로 뻗어 나오는 내 신경질을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일까. 당시 학년 부장이었던 1반 교사는 회식에서 내가 사람을 싫어하는 것 같다고 이야기했었다. 사람들에게 정을 보이라고 했었고 애들한테 잘해주라고 이야기했었다. 나는 그 사람에게 강한 반감을 느꼈다. '내가 편안해야 주변 사람들에게 편안하게 대할 수가 있지. 내가 편안하게 있으면 사회에 적응이 어려울 정도로 실수가 많은데 너희들이 이해할 수나 있어? 웃기네.' 이런 식의 생각을 한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울분에 차 항변을 했다. “나는 정신과 약 먹고 시끄러운 소리에 신경이 곤두서고 머리가 아파서 힘들단 말이에요.” (ADHD 커뮤니티의 많은 이들이 하지 말라고 하는 소리를 감정이 격해져서 했으니, 뭐 잘한 말이라고 하진 않겠다. ) 잠시 모두 침묵했다. 그 후 1반 교사는 그게 무슨 말이냐며 당황하면서도 질책하는 반응을 보였고, 실질적으로 학년 부장 역할을 한 3반 교사는 아무 말 없이 술잔을 내려다보았다. 특수교사도 그 자리에 있었는데 그녀는 내 말을 듣고 짚이는 것이 있는지 오랜 시간 동안 생각에 빠졌다. 그녀는 설마 하고 반신반의하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계속 바라봤으나 아무런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 후 나는 주변의 반응을 의사에게 전했고, 의사는 그 이야기를 유심히 듣더니 메틸페니데이트를 빼고 처방했다. 의사는 메틸페니데이트의 부작용으로 신경성이 높아질 수 있다고 하였다. 의사는 내 직업상 성질이 더러운 것보다 무능력한 게 나을 거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나는 메틸을 빼는 게 불안했지만 의사는 완강했다. 나는 2018년 하반기에 아토목세틴만 먹고 학교생활을 했다. 메틸페니데이트를 없애자 나는 점차 내 본연의 모습- 멍하고 실수가 많고 느리지만 신경성은 낮은-으로 돌아가는 게 느껴졌다. 그래도 처음에는 남들이 변화를 깨달을 정도로 겉으로 달라 보이진 않았다. 나는 학교에서 일하는 일정을 매일 강박적으로 업무 수첩에 기록하곤 했는데, 그것으로 인해 나는 겉으로 보기에 정상적으로 학교생활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학년말이 되어갈수록 처리할 일이 많아졌고, 나는 수행하는 업무에 구멍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하게 느낄 수 있었다. 변화는 서서히 누적되어 드러났다. 나는 항상 내년 반 편성을 할 때 많이 헷갈리곤 한다. 올해 우리 반 학생들을 내년 편성될 반으로 나누고, 내년 반 편성을 보고 각 학급에서 문제 생길 일이 없는지 동학년 교사들과 확인 후 엑셀에 반 편성 자료를 입력하는 일이다. 학년말에 할 일이 많은 상태에서 나는 그 일을 할 때마다 항상 헷갈리곤 한다. 그해에도 그랬다. 엑셀 파일을 취합하던 3반 교사가 학년 전체에게 평소에 전혀 안 하던 메시지(“오후 세 시까지 오류 있는지 확인 후 있으면 수정 바랍니다.” )를 보내왔지만 정신이 없어서 확인하지 못했다. (아마 내가 실수를 했는데 나만 꼭 집어 지적하기 좀 그래서 그렇게 메시지를 보낸 게 아닌가 싶다. ) 그해 말이 될수록 학교의 모든 일들이 혼란스러웠다. 메틸페니데이트를 줄이자 다양한 자극 중 필요한 자극만 선별해서 받아들이고, 집중하여 알맞은 순서로 작업의 순서를 체계화하여 업무 수첩에 기록하는 능력도 부족해졌다. 점차 생각이 산으로 가는 게 느껴졌고 현실적인 일의 순서는 이해가 가지 않고 혼자서 상념에 빠져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래도 우여곡절 끝에 학년이 마무리되어갔다. 그날은 방학식 전날이었다. 퇴근 직전 나는 해방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날 나는 해방감 때문인지, 2016년부터 매일 빠짐없이 강박적으로 상세히 작성하던 다음 날의 업무 일정을 작성하지 않았다. 그렇게 2018학년도 마지막 날이 되었다. 졸업식과 종업식이 한꺼번에 진행된 날이었는데 나는 하루 정도는 다른 사람들처럼 편안하게 있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상세하게 작성한 업무 일정이 없자 나는 혼란스러웠다. 언제 무엇을 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웠는데, 그 혼란은 학급 아이들을 내년에 배정될 반으로 보낼 때 정점을 찍었다. 반 편성 방식을 잘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나는 아이들을 엉뚱한 장소로 보냈다. 한둘만 그런 게 아니라 학급의 모든 아이들을 전혀 엉뚱한 장소로 보냈다. 각 교실에서 아이들을 기다리던 교사들이 불편을 겪자 나는 심하게 당황하였다. 나는 교내 메신저를 이용하여 교사들에게 정정하는 메시지를 보냈으나 그마저도 틀렸다. 나는 당황스러운 나머지 나를 둘러싼 시공간이 오그라들며 점차 나를 향해 조여오는 느낌이 들었다. 숨이 가빠오고 미친 듯이 어지러웠다. 그때 내 교실 문이 급하게 열리더니 3반 교사가 내 교실로 들어왔다. 그는 침착하게 아이들을 보낼 장소에 대해서 정리해주었다. 학년 부장도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우리 반으로 왔다. 학년 부장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고 나를 보았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해가 안 될 것이었으니까. 나는 아무런 생각도 행동도 할 수 없었다. 나의 전두엽은 마비 상태에 다다랐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날의 나는 약간 공황장애와 비슷한 증상을 보인 게 아닌가 싶다. 그날 우리 반은 몹시 정신없는 사바나 초원과도 같은 상태가 되었다. 그 전날까지만 하더라도 사회적 규범을 지키며 안정적으로 지내던 예쁜 우리 반 학생들이, 내가 정신을 놓고 있으니까 장난을 조절하지 못하고 마음이 붕 뜨며 총체적 난국 같은 행동을 벌였다. 아이들이 돌 던지기 장난하다가 학부모님의 차에 긁힌 자국을 냈는데 모두 자기가 한 행동이 아니라고 한 것이다. 나는 공황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알맞게 대응하지 못했다. 방학식을 하며 국기에 기계적으로 경례를 하는데 내가 발가벗은 느낌이 들었다. 방학식 후 교무실에 들어가자 교사들이 담소를 나누다가 말을 멈춘 뒤, 어색하고 의구심에 찬 표정으로 나를 봤다. 나 대신 우리 반 아이들의 돌 던지기 사건을 조사한 3반 선생이 나에게 포스트잇에 적힌 연락처를 건네며 해당 학부모에게 전화해보라고 했다. 누가 잘못했는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학부모님께 전화하는 것은 몹시 난감했다. 그날 마지막까지 나는 내 실수를 만회하고자 버둥거리고 있었다. 내가 천천히 걸어가는 교사들 사이를 지나쳐 닳아빠진 실내화를 질질 끌며 교실로 급히 올라갈 때 3반 선생이 내 뒤로 다가오더니 나직하게 말했다. “다 끝났다. 이제 집에 가자.”
그렇게 나는 2018년을 마무리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