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과 특성상 매일 휘몰아치는 어마어마한 수업량과 암기량에 고등학교 때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힘들진 않네요.
오히려 예과 시절이 더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습니다.
예과 시절에는 ADHD인 사실을 몰랐거든요. 취미 활동을 하고 싶어도, 교양 수업을 듣고 싶어도, 조별 과제 회의에 참여하려고 해도, 동아리 업무를 맡아서 하려고 해도 늘 Self regulation이 안 되어서 자존감만 떨어졌습니다.
성적이 잘 나올지, F는 받지 않을지 걱정이 되긴 하지만, 적어도 ADHD임을 모르고 살 때보단 훨씬 행복합니다.
문제의 근원을 안다는 것은, 정확하고 독창적인 해결법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교수님께서 1시간 동안 이야기한 내용을 혼자 4시간 동안 공부하면서 '공부', 정확히는 '나에게 맞는'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할지 늘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 공부법 시리즈는 통용되는 공식이나 정석이 아닌, 저만의 공부법을 만들어 가는 과정을 보여줄 뿐입니다.
ADHD라고 시도조차 하지 않거나 포기하는 미련한 짓은 하지 않습니다. ADHD임에도 잘 살아갈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노력할 따름입니다.
ADHD를 위한 공부법 2
ADHD 서울대생의 공부법 이야기 오늘은 2번째 시간입니다. 과
거두절미하고, 오늘의 공부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문장' 단위로 '생각'하자
문장 단위로 생각하라니 이게 무슨 서울대생의 공부 비결인가... 어이없어 하실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에게는 난독증이 있습니다. 음소 단위의 글자를 구별하지 못하는 난독증은 아니고, 작업 기억력이 남들보다 떨어져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글자 하나, 단어 하나는 명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간단한 문장 해석에도 무리는 없습니다. 하지만 문장이 중간 이상으로 길어지거나, 제가 익숙지 않은 정보들(전문적 지식이 아닌 과 행사 카톡 공지글 등 일상적 글에서조차)이 포함된 문장은 '문장' 단위로 해석하지 못합니다. 글을 읽으면 머릿속에 방금 읽으면 단어의 잔상과 글의 분위기는 기억이 나는데, 정확히 이 글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핵심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어떤 내용이었는지 물어보면 알지를 못합니다. 글을 읽을 수록 브레인 포그가 심해지는 기분입니다.
사람과의 대화, 유튜브 시청 등 청각을 이용해 정보를 습득하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터넷에서 호소하는 흔한 ADHD 증상이 청각 난독증입니다. 사람의 말을 중간마다 뭉개져서 듣거나, 대화의 흐름을 파악하지 못하여 특히 청각에 약하다 불편을 이야기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저도 마찬가지이고요. 집중되지 않는 브레인 포그 상황에서는 친구가 무슨 말을 해도 정확히 알지를 못하겠습니다. 오른쪽 귀에 들어가서 왼쪽 귀로 쭉 빠져나가는 기분입니다.
2시간 수업에 피피티 100페이지, 개념 이해를 위해 복습을 하려고 해도 12페이지에 1시간은 걸리는 공부량입니다. 문제는 저의 평소 공부 스타일, 사고 스타일로는 공부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눈으로는 교재의 글자를 보고, 손으로는 교재의 글자를 필기합니다. 하지만 귀로는 유튜브 뮤직 자동 재생 음악을 듣고 있고, 머릿속에서는 2~3가지 생각들이 수시로 바뀌며 머릿속을 어지럽힙니다. 2-3가지 생각 중에 공부 관련된 내용은 없군요. 주로 사람에게 상처받은 기억, 나를 초라하게 만드는 자기 혐오적인 생각, 극단적인 생각이 주를 이룹니다. 전교 일등을 단 한 번도 놓치지 않기 위해 처참한 자기 억제력을 의지로 눌러가며 공부하던 3년 간의 고등학생 시절 악몽을 다시 떠오르게 합니다. 그 당시 형성된 인지왜곡과 부정적 사고관, 극단적인 상상은 지금까지도 저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서울대 입학증 수령 후 느껴진 감정은 성취에 대한 보람과 기쁨이 아닌, 망가질 대로 망가진 정신 상태, 떨어질 대로 떨어진 자존감이었습니다. 순간 성취의 기쁨은 분명 컸지만, ADHD의 부정적인 영향들은 대학 입학 후 수 년 내내 이어졌으니 말입니다.
분명 3시간 넘게 공부를 했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아도 일단 어떻게든 공부를 해보려고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서라도 궁둥이를 붙이고 있습니다. 뭐라도 성과를 내고 싶어 공책에 피피티를 그대로 필기합니다. 문제는 공부가 끝나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키워드 잔상과 그림 잔상만 남을 뿐 제가 뭘 공부했는지 자신에게 물어보면 답을 하지 못합니다. 머리는 이미 혼란에 빠져있고요. 어제 공부가 그러했습니다. 오늘도 여김없이 음악을 들으며 공부를 하다 전혀 이해도 집중도 못 하는 저를 발견합니다. 공부 습관은 어느 정도 들여 놓은 듯하니, 처음으로 피피티 내용에 온전히 집중하는 공부를 해봅니다. 집중하기 위해선 이해를 해야 합니다. 어떻게 이해를 할 수 있는지 교재 그림을 봐도 텍스트를 읽어도 감이 잡히질 않습니다. '퍼옥시좀' '산화' '효소' '세포 소기관'... 다양한 단어들이 나열되어 있지만, 머리에 입력이 안 됩니다. 그러다,' 퍼옥시좀은 세포 내 산화를 역할로 하는 세포 소기관으로 산화 효소 등을 내부에 보유하고 있다' 의식의 공책에 문장을 써내려갑니다. '이해'가 퍽 되는 현상을 발견합니다. 내일 시험을 보면 다 맞출 수 있도록 암기를 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3-4분간은 피피티를 읽으면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이해가 됩니다.
그 순간 제가 평소 일상에서도, 공부에서도 '생각'을 문장이 아닌 '단어'로, 혹은 '간단한 문장' 정도로 해왔다는 사실을 알아차립니다. 친한 친구들과 만나도 별로 대화할 거리가 없고 겉도는 이야기만 하는 이유도 친구들과의 대화 주제로 꺼낼 만한 생각을 평소에 못하기 때문이고, 대화하면서도 생산적인 이야기를 만들 만큼 생각을 못하기 때문입니다. 매일 허둥지둥 실수하는 이유도 명확한 이유를 머릿속에서 생각하고 구체적인 행동 방식을 만드는 게 아니라 대충 생각합니다.
헬스장에서 샤워 후 옷을 갈아입습니다. 락커를 잠그고 헬스장 문을 나서려다 키를 반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다시 탈의실로 돌아가서 키를 챙겨 데스크에 내고서야 집으로 돌아갑니다. 이런 실수가 몇 번 반복돼서 '키 챙겨야지' 다짐합니다. 헬스장을 들어가서도, 심지어 운동 끝나고 탈의실 들어가기 직전까지도. 그러나 막상 옷장 앞에 있을 때는 생각이 나질 않다가 탈의실 나간 직후 다시 떠오릅니다. 제가 '탈의실에서 옷 갈아입고 나가기 전에 키를 챙겨서 나가야지. 벌써 몇 번이고 키를 안 뽑고 가서 번거로웠잖아. 옷장 문 닫고 키 체크하고 나가야지' 그 현장에서 생각했다면 실수를 했을지 궁금해집니다.
문장 형태로 생각한다는 것은 머릿속 공책에 일종의 글을 쓴다는 것입니다. 글을 쓰면 어렴풋한 생각은 논리화, 체계화, 객관화, 명확화됩니다. 문장과 문장이 모여 생긴 일종의 글을 써내려가면 내 생각의 흐름, 이유, 논리, 타당성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고 그에 대한 대책을 마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공부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적용해야 할 팁이 아닌가 싶습니다. 매일 문장 단위의 생각 없이 단어 위주로만 생각하며 살던 저에게 큰 깨달음이 왔습니다. 문장 단위로 생각하는 습관을 들이려고 합니다. 물론 더 불편하고 시간도 많이 걸릴 겁니다. 그건 문제가 안 됩니다. 남들보다 느리고 비효율적인 건 ADHD로 살아오면서 충분히 적응했습니다.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이제는 압니다.
이야기가 샛길로 샌 것 같습니다만, 이 방식을 통해 전 오늘 가장 만족스러운 공부를 했습니다. 속도는 느리지만, 교재의 그림과 글이 튕겨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 쏙쏙 들어오는 쾌감을 만끽했습니다.
공부는 수동적인 작업이 아닙니다. 공부는 일이어야 합니다. 주체적이고 능동적이고 창의적이고 독창적이어야 합니다. '몇 시간만큼 공부했느냐'는 공부 자체를 막 시작한 단계에서는 중요한 문제이지만 어느 수준 이상에서는 얼마나 스스로 고민하고 사고했는지가 중요합니다. ADHD의 뛰어난 기질 중 하나는 독창성과 기발함입니다. 여러분의 공부법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마음껏 발휘하시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