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단을 받은 지 넉 달쯤 지났다.
CAT 검사 결과 내 장기집중력은 9살 정도 수준이라고 했다. 놀랍지 않았다. 검사 중 핸드폰을 곁눈질하고, 심지어 캐시 앱 퀴즈를 푸는데 망했다는 사실을 모를 수는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퀴즈를 풀며 속으로 스스로를 욕했지만, 그러지 않기가 힘들었다. 나는 ADHD인들이 진단 전에도 스스로의 문제를 분명히 파악하고 있으리라는 편견이 있다... 나 또한 처음 ADHD에 관한 설명을 들었을 때, 어떤 의구심도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나잖아?"
치료를 받으면 좋겠지? 생각한 뒤에도 병원에 들르기까지는 여러 결심이 필요했다. 초진 때 기죽고 짓눌린 마음으로 상담의에게 "큰 기대는 하지 않아요." 하고 말했던 게 기억난다. "사람이 쉽게 바뀌기는 어렵잖아요." 상담의도 내게 "솔직히 실수를 아예 안 하게 될 수는 없을 거예요. 그래도 조금씩은 줄어들 거라고 생각합시다."라는 요지의 답을 줬다. 그 때는 정말 그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18mg으로 시작해 36mg에 정착한 콘서타는 내가 체계적 사고의 기반을 세우도록 돕는다. 보고해야 할 돌발사항, 업무 중 전화통화에 필요한 접근 방식, 회사와 별개로 혼자 진행 중인 작업에 매진하려면 필요한 준비 과정. 이전에도 목록화하고자 노력했던 과정을 머릿속에서 순차적으로 정리하기가 한결 쉬워졌다. 내원 며칠 전에는 분명 두 번씩 확인했는데도 놓치고 지나간 작은 실수가 나를 괴롭게 했다. 별 것 아닌 실수였지만 실수를 저질렀다는 사실 자체가 고통스러웠다. 내가 앞으로도 영원히 크고 작은 실수를 반복할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 느껴진 탓이다.
한두 달쯤 약을 먹자니 작은 실수들이 확 줄어들었다. 자신감이 싹텄다. 나는 영원히 실수를 반복하는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조심스러운 희망에서, 실수를 저질러도 헐! 하고 지나칠 수 있는 초연함이 자라났다. 내 업무는 코로나 진행상황에 따라 변동폭이 큰 편이니, 실수하는 것도 자연스럽다. 잘 지켜보니 동료들도 종종 실수를 했다. 도울 수 있는 선에서 도왔더니, 꼼꼼한 사람이라는 평도 듣게 됐다.^^; 사실 정말 결정적인 실수라는 건 드물잖아. 수습할 수 있다면 된 거지. 집에 오자마자 따뜻한 물에 씻고, 스트레칭을 하고, 정해진 시간에 맞춰 잠자리에 들면 실수로 괴로운 마음도 사그라든다.
이건 진짜 기대 외의 소득인데, 대화 중 사람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도 확연히 달라졌다. 이십 대 초반까지 나는 "죄송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두서없이 흥분해 떠들고 집에 가는 길에 죽도록 민망해지는 경우도 잦았다. 그런데 이젠 카페에서 드립백을 고를 때도 "정확하고 꼼꼼히 말씀하시네요. 주문을 받기가 편해요." 같은 말을 들으면 엥 세상이 나에게 몰카를?? 이런 생각이 안 들 수 없다. "너 예전보다 정보를 정리해 말하는 속도가 1.3배는 빨라졌어." 몇 달 만에 만난 임상심리사 친구의 감탄. 어깨가 으쓱해졌다가, 또 뭐 이런 걸로... 싶어 자제했다가, 아니지 나는 자신감이 필요해, 하면서 다시 어깨를 으쓱 펴 본다.
어깨는 쭉 펴졌지만, 나의 노력만큼이나 환경의 뒷받침도 중요하다고 명심하려 한다. 지금의 나는 여유시간 확보가 용이하고, 업무에도 적응할 연차가 됐고, 친구들도 ADHD에 관한 편견이 없고, 상담의와도 잘 맞고, 무난히 콘서타에 정착했고... 이럴 때, 고통스러운 환경에 노출될 경우를 대비한 힘을 기르고 메뉴얼을 짜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환경의 수많은 맥락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해도 조금씩 바꿔나갈 수는 있을 테니까. 마음 속에 힘이 있다는 것이 좀 더 분명히 느껴지니까.
뭔가가 잘 안 된다는 좌절감을 내내 끌어안고 살았다. 좌절감이 없다면 정말 행복할 것 같았지만, 그게 없는 나를 전혀 상상할 수가 없었다.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 지난 몇 달 동안 눈 녹듯 이루어졌다. 신기하지. 지금까지의 내가 모르는 행복도 분명 더 있지 않을까? 여전히 부족하고, 노력할 것들이 정말 많지만, 매일매일 즐겁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