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력한 기분조차 없이 무기력한 날이 종종 있다. 머리에 안개 낀 느낌이 드는 것도 아니고, 특별히 피곤한 것도 아니고, 머리는 맑고 우울이나 불안을 느끼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해야 할 일이 하기 싫어서 회피하기 위해 하던 행동조차 재미가 없다. 끝없는 회피행동에서 오는 절망감이 없으니 무기력한 기분이 아니란 생각이 드는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느끼지 못하는 게 아니라 꾹꾹 누르고 모른 체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되는 순간이 온다. 주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꾸역꾸역 입에 뭘 집어넣는다던가 생각들이 언어조차 되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모양을 볼 때 그렇다.
잠깐 잊은 것도 아니고, 그 위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 그것들이 나오지 못하도록 잔뜩 버티고 있는 모양 같다. 우울과 불안이 커질수록 무뎌지는 것도 능숙해진다. 무뎌지는 것은 무의식적인 과정이고 내 바람과 정반대의 결과를 낳지만 사실은 충분히 선택할 수 있는 문제다. 나는 그것들은 내보내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래도 나는 압도당하는 게 무서워서 잠깐 엿봤다가 눈을 돌린다. 그러고선 무기력해지지 않을 다른 방법을 찾는다.
그렇지만 오늘은 적어도 모른 체 하지 않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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