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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이 별로 없다.
Level 4   조회수 103
2020-05-09 23:19:11

요며칠 집중이 안 된다. 이유는 알기 힘들지만 이유는 몰라도 이게 자연스러운 완급이라는 건 이해한다. 누구나 언제나 항상 좋은 상태일 수는 없는 거니까.


녹아내릴 것처럼 힘들다. 열심히 하지 못하는 것이 힘들어서 열심히 하지도 않는데 힘들다. 기분... 상태가 괜찮을 때는 별을 생각하고 이 작고 거대한 세계를 생각하면 경이를 느낀다. 지금 생각하면 공포가 아주 크다. 압도적이다.


아버지는 아직도 나보고 빨리 결혼하라고 하신다. 하지만 고작 서른인 나는 이미 너무 지쳐서 그런 쪽으로는 생각이 돌지 않는다. 실내화에 압정이 들었던 유치원 시절, 어머니가 같이 죽자고 했었던 유치원 시절 왕따가 아닌 시절이 없었던 유년기. 고함소리로 얼얼한 뺨의 감각으로 남은 십대. 생각해보면 마찬가지로 에이디같은 젊은 어머니의 불같은 성격이나 아버지의 경상도식 무식함에도 불구하고 집안이 지금같은 상태로 유지되어 온 건 그 모든 단점들을 뛰어넘는 부모님의 인내 때문인데... 나는 굳이 그렇게 인내해서 세상을 살아야 하는지 잘 모르겠고 그럴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녹아버릴 것처럼 힘들다. 녹아버렸으면 좋겠다. 결혼이라는 키워드에 대해서 내가 이렇게 부정적으로 생각한다는 걸 부모님이 모르는 것이 신기하다. 결혼을 완성이라고 생각하는, 혹은 필연적 과정으로 생각하는 부모님의 무지에 대한 벌은 그 틀 안에서 자기들의 자식이 완성되지 않는다는 것을 자각하는 고통이다.


나의 에이디로 유년기에 대한 설명의 끝을 맺을 수도 있고 그걸로 시작할 수도 있다. 어쨌거나 이 끔찍한 내 내면의 덩어리들은 너무나도 완벽하게 나만의 것이다. 마치 누군가의 요트에 부딪혀서 산산이 조각나 어떻게든 접합수술 중인 환자보고 그래서 수영장 파티는 언제 갈래? 라고 묻는 것 같다.


나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는 않을 거다. 아마도 따뜻한 물 속에 숨고 싶어서 어항을 만들었다. 나는 세상 같은 거랑 아무 상관 없는 상태가 되고 싶다. 요즘 기준으로 보면 내 인생의 반 이상은 보호소에서 보냈어야 온전하다. 가정 내 학대 학교 내 왕따 미숙아 발달장애, 이 모든 과정들은 기록이 남지 않기 때문에 대학 이름으로 감출 수 있었다. 그러나 합격하더라도 내 삶은 앞으로도 스펙에 남지 않는 가시밭길일 것임을 나는 잊으면 안 된다. 작게 조용히 있었는지도 모르게 숨어있다 편안하게 잠들고 싶다. 그래서 나는 온수가 좋다.


고난을 극복한 사람은 그 많은 부분을 자신의 노력의 탓으로 돌리고 싶어하고 고난에 쓰러진 사람은 그게 다 자기 불운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전자는 운이 좋았을 뿐이다. 후자는 노력하지 않을 뿐이다. 나는 그 두 상태를 오가면서 교차-자기 혐오를 하곤 한다. 지친다.


요며칠 그래서 집중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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