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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합리적 신념' 과 감정, 그리고 무언가를 끊는 연습
Level 2   조회수 284
2019-12-11 12:42:15

(스압주의, 요약 있음)

이전에 신념과 관련된 글을 쓰고난 후 문득 내가 과거에 '비합리적 신념'이라는 걸 접한 적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내가 특정 신념에 집착적으로 '타당하다' 라는 딱지를 달아준 이유가 있다.

 

"Ellis의 비합리적 신념 12가지"이라 하는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은데...

[사람관계에 있어서 불합리한 신념]

1. 알고 있는 모든 중요한 사람으로부터 사랑 받고, 인정받고, 이해 받아야만 가치 있는 사람이다.

2.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여야만 하고, 의지할 강한 누군가가 있어야만 한다.

3. 타인의 문제나 혼란스러움에 함께 괴로워하고 속상해 해야 한다.

4. 어떤 사람들은 나쁘고 사악하며 따라서 비난받고 처벌받아야만 한다.

[세상일에 있어서의 불합리한 신념]

1. 완벽한 능력이 있고, 사교적이고, 성공해야만 가치 있는 사람이다.

2. 일이 뜻대로 진행되지 않는다면 이는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일이다.

3. 인간의 문제에는 완벽한 해결책이 있고 만약 그 해결책을 발견할 수 없다면 이는 끔찍한 일이다.

4. 세상은 반드시 공평해야 하며 정의는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

[운명에 대한 불합리한 신념]

1. 행복이란 외부사건들에 의해 결정되며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2. 인생에서 어려움을 부딪히기보다는, 피해 가는 것이 편하다.

3. 위험하거나 두려운 일이 일어날 가능성을 늘 생각하고 있어야 한다.

4. 과거의 일들이 현재 행동을 결정한다.

 

5년 전, 스펙으로 어떻게 넘겨서 간 기업들의 면접에서 대판 털린 후에 이런 내용들을 자취방 벽에 붙여놓고 매일 봤던 기억이 난다.

효과가 있었냐고? 음.... 글쎄...

내가 '비합리적' 사고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알았지만', 딱히 사회에 대한 내 반응이 바뀌진 않았다. 오히려 내가 '비합리적' 사고를 한다는 사실에 사로잡히고, 남들이 '비합리적' 사고를 하는 것을 보며 인간은 모순덩어리가 아닌가 하는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오히려 세상을 더욱 부정적으로 보게 되었고, 당시를 기억해보면 '왜 학부모들은 사교육에 집착하는가? 학원은 학부모들의 불안을 팔아먹는 장사꾼이다.' 라든지 '설득/세일즈 기법은 어떻게든 팔아먹고 싶어서 사람들에게 더 좋은 물건처럼 보여서 더 비싸게 팔아먹고자 하는 방법, 필요도 없는 물건을 이미지로 포장하고, 거절을 어렵게 하는 기법으로 사람들한테 강매나 하는 방법' 으로 사람들의 행동을 폄하하기도 했다. 왜 사람들은 멍청한 선택을 할까? 혹은 알면서 왜 못할까? 라는 생각을 가졌던 것 같다. 물론 그 '사람들' 에는 나도 포함이었다.

 

난 무척이나 감정적인 사람이었고 맨날 감정을 주체 못해서 작은 일에 들떴다가 넘어지면 기분이 바닥까지 처박히곤 했다. 물론 지금도 남이 말할 때 종종 끼어들다가 당황하고, 선배의 지루한 훈계에 "제 생각은 다른데요!"라는 말을 참느라 어쩔줄 몰라하기도 한다. 누군가 무례하게 굴면 화도 나지만 그게 다였다. 얼마 전 무대공포증이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지만 딱히 우울한 기분은 들지 않는다.

 

어째서 지금은 감정을 예측하고 통제할 수 있게 된 것일까? 갑자기 의문이 들었다.

 

 

문득 어떤 분이 쓰신 '마음챙김(Mindfulness, 원 단어 보고 한국 건 줄 알았다. 번역 이쁘게 했는데 챙김이란 단어가 위로를 의미하는 것 같아 좀 이상한 느낌도 든다)'이란 단어를 보고 어디선가 본 듯 했는데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찾아보니 '신념 교정치료' 를 통한 우울증 치료 환자들이 '교정된 신념'을 가지고 있는데 여전히 우울증이 재발하더라, 그 재발은 '기분'에 의한 것이었다는 해석으로, 분출명상을 통해 감정을 느껴보는 것을 포함한다고 했다.

(여기서 의문인게, '신념이 교정되었다'는 것이다. '인지행동치료'가 과학적 배경을 바탕으로 하는 건 사실이지만 과연 상담실에서 사람의 신념을 바꾸는 게 가능할지 의문이다. 물론 '학습'은 되겠지만, 기대대로 '작동'하려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종교적인 흡인력이 있어야 할 텐데...) 

머리속에 '남의 신경을 쓰지 말 것, 감정을 부정하지 말 것' 이란 명제만 남고 기타 Mindfulness라는 용어나 명상 등은 잊어버리고 있었다. 행위 지향이니 존재 지향이니 좋은 소리이다. '나는 존재 자체로 소중해~'라고 하는데 그런 상황이 아니라면 사실 와닿겠는가. 명상을 통해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도 좋은데 음... 왠지 '모든 것과 단절된 수행자의 삶을 살아야 되는가, 난 이쁜 옷 입고 맛있는 거 먹고 재밌는 거 보고 살고 싶은데...' 하는 생각에 이전에 보고도 흘려넘겼던 것 같다.

(오해하면 안 될 점은, 명상은 정신건강과 집중력 향상에 매우 좋은 취미이다. 스포츠 선수들도 활용하고 실제로 과학적으로 그 효과가 입증되었다. 또한 산속에 틀어박힐 필요도 없다.)

 

한편 나는 언제나 머리속에 추구하는 이상적인 나의 모습이 있었고, 대략 '자기가 볼품이 없어도 남의 비난에 흔들리지 않고, 감정적이지 않고, 남을 배려하면서 자신감을 가진 사람' 정도였던 듯 하다. 그리고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며 무례한 손님도 부드럽게 받아넘기는 사람은 내 동경의 대상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난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후임에게 충분히 일을 배울 시간을 주고, 격려도 해주고, 질책이 아닌 조언을 해 주며, 잘 하는 부분을 집어서 칭찬해주고, 다른 부서와 문제가 생겨도 자신의 선에서 책임을 지고 나의 책임은 내가 할 수 있었던 부분으로 제한해주는. 무언가를 극복한 사람들의 일화를 찾아보기도 하고, 자존감이 높은 사람들을 분석해보기도 하고, 여러 집단 상담이나 세미나도 방문하고...

 

그만큼 내가 감정적인 것을 싫어했는데, 놀랍게도 불행을 겪고 재기한 사람들이나 외모나 능력이 볼품없어도 당당한 사람들 또한 감정의 파도를 겪는다는 것이었다. 이 점은 나에게 위안이 되었다. "저 사람들도 가끔씩 나처럼 감정에 부딪힌다니.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나도 저런 사람들처럼 단단한 자아를 가질 수 있겠구나!" 라는 희망이 '당장 눈앞에는 보이지 않지만 세상에 존재하고 나에게도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이 되었다. 여러 감정을 다스리는 법에 대해 알아보곤 했다. 좌절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서는 사람들을 설명하는 용어가 '회복탄력성(Resilience)' 인데, 이에 착안하여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면 그만이다' 라는 사고체계를 빌려올 수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1. 바다 위를 순항하다가 감정의 파도가 휩쓸려오면 좌초되서 겨우 살아나오고 바다로 돌아가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마음이 안정될 때까지, 의욕이 다시 생길 때까지 기다리기)

2. 풍랑이 거세지만 파도에 부딪히기 전에 먼저 부두로 돌아와서 파도가 잠잠해지기를 기다리고

(감정에서 벗어나오기, 감정을 느끼는 나와 이성의 분리)

3-1. 파도를 거슬러 올라가지 않고 사선으로 항해하는 법을 익혔으며

(파워 포즈, 심호흡 등)

3-2. 파도가 오면 연안에서 파도타기를 즐기기도 했다.

(감정을 이용해 다른 걸 하기, 감정을 분노에너지로 바꾼 무산소성 훈련)

 

(지금은 뭐... 비오는 날 막걸리 먹듯이 구경하는 수준이다. 무엇 때문에, 어느 시점에서, 언제쯤 올지도 예상하는 등 파도를 분석하기도 한다.)

 

한편, 감정을 통제할 수 있다고 해서 '감정을 누를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나의 행위가 예측 가능한 범위 내로 한정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는데, 결국 감정을 누를 수 없다면 나는 영영 '감정적인 사람' 이라는 것이 아닌가? 분명 전진 후퇴 속에서 장기적으로는 발전하는 인생이었지만 여전히 난 서툴렀고 '감정을 조절하는 사람'이 되기에는 요원했다.

 

개인적으로 극진공수를 만든 '실전파' 최영의를 존경하는데, 한때 그는 입산수도를 하며 밤마다 정신수양을 했다고 한다. 종이에 원을 그리고 가운데에 집중하는 그런 류의 수련이었는데, 웃기는 사실은 어떻게 해도 신체의 욕구(이성에 대한 욕구)는 도저히 사라지지 않더란 것이다. 과거 이 말을 접했던 것이 불현듯 떠오르면서(@의 장점;;)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감정을 누르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데 왜 나는 감정을 누르려고 했는가? 나는 스스로를 기계처럼 대했고, 나는 기계가 아니었기에 실현불가능한 목표였다.

 

거기서 얻은 중요한 사실은 나는 감정을 부정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헌데 누구나 갖는 감정, 감정을 긍정하라고 하는데 어떻게 긍정하느냐 이거였다. 이 '쓸모 없는' 감정을. 

 

 


한편, Mindfulness를 창안해낸 연구자들의 의견에 따르면, 내 감정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리가 있다. 감정이 단지 생화학적 반응이라고 치부해버리면 감정을 애써 '무시'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인간이 70% 물 기타 등등으로 이루어진 유기체이네, 우주의 먼지이네 해도 지금 내가 느끼는 게 있는데 이게 무슨 소용인가? 이론적인 논박이 안 먹히는 이유이다. 그래서 이전에 '신념을 바꾸는 것은 정말 어렵다. 증거를 꾸준히 제시해야 한다' 라는 의견을 낸 적이 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유리하다 생각되는 새로운 신념'이 작동하지 않는 이유는 결국 내가 현재 느끼는 감정이 그 자체로 강한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힘들다면 '내가 힘든 증거'. 상황이 바뀌고 적극적으로 새로운 신념을 옹호한다면 감정의 입지가 줄어들겠지만 '세상이 바뀌지 않는데 내 인식만 바뀐다고 달라질 것 없다' 를 강하게 증명하는 것은 내 '감정'이다. (감정에서 분리되는 것은 너무나도 힘들다. 의식적으로 나와 감정을 분리하는 연습을 익숙해질 때까지 꾸준히 해야 한다)

 

그럼 감정을 받아들이는 건 어떨까? 스스로의 감정을 느끼고, 그것이 자연스러운 반응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매우 도움이 된다. '내가 화가 났다' -> '내가 화 라는 감정을 느끼고 있다' 라는 입장 변화와, '나는 감정적인 인간이다. 인간은 감정적이다.' 를 인정하는 것도 무작정 감정을 무시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감정적인 인간' 이라는 딱지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감정적인 인간이라는 딱지는 '나+감정적인 특성'으로 분리가 불가능하니 감정적인 점을 개선할 점으로 삼게 되면 결국 '하... 얘 또 시작이네. 언제 조용해질래?' 라는 사고에 빠지게 되었다. 결국 '감정적인 나', 즉 '나 스스로' 를 은근히 부정하게 되었다.

 

이런 사고가 깨진 것은 상당히 최근의 일이다. 내가 @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의 구조적인 차이 등에 대해 알아보다 우연히 '내가 그토록 싫어하는 충동적 선택의 원인인 감정이나 비약적 사고는 사실 생물체가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기능' 이라는 사실을 접하게 된 것이다. 내가 느끼는 공포나 분노 기타의 부정적 감정들은 '나를 지키는 안전장치'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내 통제 가능한 영역이 넓어졌다고 생각했다. 또한 '세상에 나쁜 것은 없다' 라는 깨달음은 모든 일에서 가치판단을 배제하는 연습을 가능하게 했다.

 

그렇다. 감정은 나쁜 것이 아닌, 본래 '쓸모 있는' 것이었다. 그로 인해 '감정을 가진 나' 또한 부정할 이유가 없다. 남들이 다치기 쉬운 칼이라면 칼집에 담아 보관하면 되고, 주체하지 못하는 동력이라면 변속기를 달면 된다. 감정을 누르기보다 내가 원래 감정이 풍부하다는 것을 주변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인식시키고, 표현 방법을 바꾸고, 일반인의 사고방식을 배우고, 내 생각을 자연스럽게 말하는 연습을 하다 보니 '자기 주장도 있고, 거절도 할 줄 알고, 하기 싫은 일은 안 하지만 할 때는 열심히 하는' 사람의 이미지를 씌우는 데 성공한 듯하다. 이런 변화의 시작은 '감정은 나쁘다' -> '감정을 가진 나는 나쁘다' -> '감정을 고쳐야 한다' -> '고치는 건 불가능하다' -> ... 의 악순환에서 '감정은 나쁘다'를 깨는 것이다.

 

 

투쟁-도피 본능이란 말을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감정의 쓸모를 생각해보면

 

분노: 공격당할 때 싸워서 이김으로서 보호한다.

공포: 이기지 못할 것이라 판단되는 상황에 도망쳐서 보호한다.

성취감(들뜸): 하던 일에 대한 기대로 더 할 수 있게 밀어준다.

우울(가라앉음): 실패가능성을 보고 다치지 않게 도전을 멈춘다.

불안: 생존의 가능성을 올리기 위해 안전을 확인한다.

안정: 생존이 보장되었기 때문에 에너지를 아낀다.

 

등등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감정에도 한계는 있다. 우리의 또다른 자아(무의식, 본능 등으로 부를 수 있겠다)는 세상을 직접 보는 능력이 없다. 예를 들어 무대공포증이 있다면 먼저 '무대에 올라갔다는 정보'를 시각 등으로 얻고, 이것을 바로 '무대에 올라갔다고? 전에 남에게 안 좋은 평가를 받았잖아! 이번에도 나쁜 평가 받겠다. 이건 이길 수 없어. 도망쳐!!' 로 해석해서 아드레날린을 뿌려서 '긴장하지 않는다' 라고  의식적으로 생각해도 신체의 반응이 먼저 오는 것이다. 만약 들뜨는 일이 있으면 '현재의 순간의 성취'로 '이렇게만 하면 넌 할 수 있어!! 무조건 고!' 라고 판단해서 기분이 확 올라가게 되고, 반대로 갑자기 실수라도 하면 '야 안돼!! 멈춰 너 부서진다' 하고 우울감으로 제동을 거는 것이다.

 

이런 '기분'의 문제점은 장기적인 관점을 반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야구를 하는데 공을 5번 던졌는데 한번 스트라이크가 들어가면 공을 잘 던지는 것인가? 혹은 20번 던졌는데 5번 실수가 났으면 공을 못 던지는 것인가? 순간변화율이 언제나 평균변화율을 반영하지는 않는다. 수렵 시대의 빠른 판단을 담보했던 기능이 역으로 현대사회에서는 쓸모가 줄어든 것이다.

 

여러 시도 중 특히 불안감정을 넘기기 좋은 연습이 하나 있다. 그것은 무언가를 끊어 보는 것이다. 이거 없이 살 수 있을까 싶은, 생명, 생계에는 지장이 없지만 습관적으로 하는 생산적이지 않은 것을 끊어보는 것이다. 인터넷, 핸드폰 없이 살기라든지, 유튜브 끊기 등. 당신만의 'Guilty Pleasure(안 좋은 건 알지만 끊을 수 없는 초코케이크 같은)'는 무엇인가?

나는 알콜 의존이 강했고 매일 최소 맥주 한두캔씩은 기본에, 시험 공부나 과제를 하면서도 술을 마셨고, 누구랑 만나면 취한 기분이 너무 좋아서 다음날 지장이 올 정도였으니, '이 좋은 술은 절대 끊지 못할거 같아' 라고 내심 생각했다. 수험의 강력한 핑계로 잠시 끊긴 했는데, 다양한 감정이 들었다. 뭐라도 대체해야겠다 싶어서 무알콜 맥주를 사서 마시기도 했다. 한 달 정도 지나니 '술 없이도 살 수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들던 것이었다. 그 후에 종종 알콜 문제를 느끼고 다시 끊고 하니 생각보다 살만하다. 말은 쉽지만 끊는 연습만 10년은 했고, 금연 시작에 성공하는 데에 7년이 걸렸다.

 

중독의 금단증상은 한마디로 불안의 감정이다. '왜 안줘?' '나 그거 없인 괜찮지 않은 것 같아' '꼭 그래야 돼?' 온갖 생각이 들고, 만약 직장 생활 중이라면 남과 충돌하는 일이 잦아질 수도 있다. 그럴 때는 '내가 금연중이라 오는 현상이야' 라고 중독에 변명을 뒤집어씌운다. (기왕이면 동료들에게도 미리 말해주는 것이 이해받기 좋겠다) 그렇게 3일을 넘기면 숨통이 트이고, 다시 7일에 고비가 오고...

1주일 끊기, 한 달 끊기 등 정해진 기간이 지나면 문득 '내가 왜 이거 없이 못 산다는 생각을 했지? 내가 왜 불안해 했지?' 라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결국 '불안' 이란 감정이 나의 '불안'한 미래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증명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론으로 아는 게 아닌 몸으로 직접 깨달은.

 

무언가를 끊는 연습은 도파민 과다-부족현상에 대한 면역을 강화하는 데에 이미 실험으로 증명되었다고 알고 있고,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경험을 통해 부정적인 감정이 왔을 때 더 이성적으로 유리한 선택을 할 수 있게 한다. 이것이 반복되면 새로운 일에 뛰어드는 도전적인 선택과, 실패했을 때의 우울감에 지배되지 않고 재기할 수 있는 능력이 증가할 것이다.

 

내가 느끼는 감정은 그 순간에만 유효하다. 내가 느끼는 감정이 내 미래와 동일하지 않다.

 

 

 

요약:

1. '비합리적 신념' 을 '교정' 한다는 인식은 스스로를 '비합리적'이라고 낙인 찍는 원인이 될 수 있다.

2. Mindfulness 연구에 따르면 '교정된 신념'은 '감정'에 무기력하다.

3. 누구나 감정을 가지고 있고 꽤 많은 성공한 사람들도 감정적이 되는 점을 인정한다.

4. 감정을 적절히 관리하거나 활용할 수 있지만, 감정을 억누르거나 없앨 수는 없다.

5. '감정', '감정적인 나' 를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자기혐오에 빠질 위험이 있다.

6. '감정'은 나쁜 것이 아니다. 나를 보호하는 장치이며, 단지 작동 방식을 배워야 한다.

7. 무언가를 끊는 연습은 '불안'이라는 감정을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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