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글을 올려봅니다...!
어릴 때부터 저는 유난스러울 정도로 물건을 챙기지 못했습니다. 제가 하도 교재를 안 챙겨 다니니까, 유치원 때는 모든 원우들 앞에서 손바닥을 맞고 수업 시간 내내 혼자 손을 들고 서 있는 등의 체벌을 자주 받았습니다.
그 당시 느낀 모멸감만큼은 생생하게 기억나요. 머리에 피가 쏠리는 것 같았고, 귀에는 딩- 하고 울리는 소리가 나면서,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모두 멀리 떨어지는 것 같았고, 누군가가 배를 쥐어짜는 것 같았어요.
어느 날 엄마가 우연히 제가 혹독한 체벌을 받는 모습을 보고, 바로 저를 데리고 집에 왔다고 해요. 아이가 뭘 못 챙기는 건 당연하다, 맞벌이인 부모 밑에서 내가 챙기지 않은 탓인데 아이를 혼내면 안 된다고 엄마가 원장과 대판 싸웠다고 하더라고요.
초등학교 가서도 교재랑 준비물을 지나치게 못 챙겼습니다. 보다 못한 담임 선생님이 제가 알림장에 준비물을 잘 썼는지 확인까지 하고 돌려보내곤 했는데, 그 알림장조차 매번 잊어버렸습니다. 책상도 지저분하게 써서 짝궁이 저를 때리고 괴롭히기도 했습니다. 담임 선생님은 아이가 분명 문제가 있으니까 특수학교 진학도 고려해보라고 했대요. 그런데 지능검사에서는 문제가 없었고 심지어 성적도 줄곧 올백만 맞아버렸어요. 저의 문제는 그냥 없던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ADHD라는 용어를 모두가 모를 때였어요.
중학교 가서도 똑같았습니다. 초등학교 때는 그냥 어리니까 이해가 되었는데, 중학생이 여전히 이런다는 건... 남들도 이해를 못 했고 저 스스로도 이해가 안 갔습니다. 뭔가를 못 챙기는 제 모습에 스스로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고 모멸감과 자괴감도 자주 느꼈습니다. 엄마가 매번 제가 두고 간 숙제나 교재를 가져다주러 오셨고, 엄마가 학교에 워낙 자주 오니까 유명인사가 되었고, 엄마에게도 미안하고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엄마에게 일부러 연락을 안 하거나 준비물이 바뀌었다고 거짓말을 하고는, 수업시간엔 혼자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수그리고 앉아 있곤 했어요. 이런 상황들이 익숙해졌지만, 그 모멸감은 쉬이 익숙해지지 않더라고요. 거의 매일 화장실에 가서 몰래 울었어요. 유치원 때 체벌을 당하던 그 때처럼 귀에서 윙윙 거리는 이명 소리가 나고 아찔하고 배가 아팠고, 그 때문인지 두통과 복통을 달고 살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여러 다른 개인적인 사정도 겹쳐서, 학교를 자퇴하게 됐습니다. 자퇴하던 날 담임 선생님이 뭐가 가장 어렵냐고 물어봤어요. 저는 마지막이니까 솔직해지기로 결심하고, 한참을 망설인 끝에 말을 꺼냈습니다. "제가 뭘 못 챙긴다. 해보려고 해도 너무 안 된다. 너무 힘들다."라고요. 엄마에게도, 친한 단짝 친구에게도, 인터넷에서 익명으로도 털어놓지 못한 고민이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웃더라고요. '네가 아직 곱게 자라서, 힘든 일을 안 겪어봐서 그렇다. 어른이 되고 고생 좀 하면 저절로 나아진다.'라는 답변을 들었습니다. 저는 집안에서 곱게 자라지 않았어요. 바쁜 엄마 일을 도와주거나 동생 밥을 챙겨주고, 집안일도 하면서 자랐어요. 힘든 일도 제법 겪었습니다. 너무 억울해서, 뭐라 따지지는 못하고 그저 한참을 울었습니다. 선생님은 계속 같은 말을 반복했어요. '세상엔 더 힘든 일이 많은데 너는 이걸 고민할 수 있는 것도 나중엔 감사한 일이 될 거야'라는 식의 말이었던 것 같아요. 악의가 없으셨지만 저는 또 한 번 자괴감만 느끼고 말았습니다.
자퇴한 이후부터 동네 보건소였나 어디었나, 아무튼 어딘가에서 무료로 심리 상담을 받았어요. 혼자서 인터넷을 찾아보고 ADHD란 용어를 알게 되어서, 상담에서도 제가 ADHD인 것 같다고 말했어요. 그럴 리 없다고 단언하시더라고요. 왜 그러냐니까, 제가 지금 상담 하는 내내 가만히 잘 앉아 있었기 때문에 그럴 리가 없다는 거에요. 저는 정보를 많이 찾아본 뒤였기 때문에, 'ADD라고 과잉행동이 없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고 설명했더니, 그러면 너는 집중 자체가 안 되어야 하는데 집중을 할땐 잘 하지 않냐는 거에요. 전 계속 설명을 했어요. 집중력의 문제가 아니라 어디에 집중을 해야 할지 조절이 안 되는 게 문제인 걸로 안다고요. 그랬더니 이후 저희 엄마랑 상담을 했는데 (나중에 엄마가 그 상담 내용을 말해줬어요... 원래는 저에게 절대 전달되면 안 되는 내용인데, 엄마가 저랑 싸우던 와중에 화가 나서 충동적으로 말을 해버린 상황입니다.) 제가 사실이 아닌 걸 사실로 믿고, 권위자 앞에서도 그걸 주장하는 걸 보니 조현병이나 성격 장애도 의심된다고 그랬대요. (그 분이 왜 그렇게까지 이야기했는지 잘 모르겠어요 ㅠㅠ 저도 어릴 때였으니 상담 선생님께 꽤 공격적인 태도로 말을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전 너무 화가 나서 정신과나 상담을 무척 불신하게 되었어요.
5년 뒤에서야 다시 상담을 받으러 다니기 시작했어요. 친구도 우울증으로 상담을 받고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그 친구의 추천과 설득에 힘입어 다시 상담 문을 두드렸습니다.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던 마음도 컸고요. 그 뒤로 거의 5년 동안 네 군데에서 상담을 받았고, 세 군데의 병원을 찾아갔고, ADHD는 아니라는 말만 들었습니다. 우울증과 수면제를 계속 복용했는데, 문제는 병원 가는 날도 종종 잊어버려서 약물치료를 원활하게 진행하지 못했어요. 상담도 마찬가지였어요. 상담비 입금을 잊어버리거나, 지각하거나, 상담 자체를 까먹거나, 상담 과제를 두고 오는 일이 잦았습니다. 급기야, '이 상담기관을 만만하게 생각하지 말아주세요'라는 말도 몇 번 들었습니다. 저는 상담을 거의 생명줄처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처를 받았고, 겨우 오해를 풀기도 했지만... 상담을 4번이나 바꿔야 했던 이유가 대부분 상담비 미입금 또는 지각이나 상담 자체를 까먹는 일이 너무 잦아져서 규정상 짤리게 된 거였습니다. 제 생각과 달리 내가 상담을 정말 가볍게 생각했나? 상담조차 가볍게 생각하는 거면, 나는 그 무엇도 중요하게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인가? 내가 그렇게 쓰레기인가? 저는 현대 의학도 구원할 수 없는 인간 말종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다가 네 번째로 찾아간 정신과에서 우울증과 수면제를 8개월 복용하던 끝에, (그때도 제가 예약을 자주 잊어버리는 바람에 흐름이 끊기곤 했는데, 제가 다시 전화해서 예약 잡아달라 하면 흔쾌히 들어주셔서 덕분에 오래 다닐 수 있었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혹시 ADHD 아니냐는 말을 던졌어요. 그때 기분은 말로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저 혼자서 ADHD인 걸 15년이나 의심해 왔는데 누구도 안 들어줬지만, 드디어 의사 선생님이 그 말을 먼저 꺼내주신 거잖아요. 처음엔 뛸 듯이 기뻤고, 집에 와서는 한참 울었어요. 그동안 이해 못 받은 세월이, 치료를 받지 못한 채로 저를 한없이 자책한 긴 세월이 너무도 억울했습니다.
그 이후에도 제가 ADHD인지 아닌지 가끔 헷갈리곤 했습니다. ADHD라기엔 과잉/충동 행동은 그리 크지 않고, 과몰입하는 경우도 잦았거든요. 다만 주변이 정리되지 않고 무질서할 뿐인데, 이런 내가 정말 ADHD일까? 요즘 현대 사회에서 만들어낸 병이란 말을 듣고는 더 혼란스럽더라고요. 그렇지만 진단명 자체는 그리 중요한 것 같지는 않아요. 이런 종류의 증상을 치료할 방법이 있음을 알게 된 것이 가장 중요하고 큰 수확인 게 아닐까 싶어요. 콘서타를 복용하고 있지만 저는 여전히, 계속 약속을 까먹고, 지각하고, 물건을 잊어버리고, '내가 뭐 하러 나왔더라'하고 멍 때리고, 사람 말 중의 일부를 놓치고, 정리정돈을 못 하고, 계획을 지키지 못하고, 계획을 세운 것 자체도 까먹어버리고, 스케쥴러에 적어놓더라도 스케쥴러 자체를 잊어버리거나 그 존재를 까먹어버립니다. 인지행동치료를 스스로 적용해보고 있는데, 한 발 내딛은 것 같으면 다음날 두 발 후퇴하는 일의 반복입니다. 그렇지만 병원 상담과 예약을 조금씩 지키기 시작했고, 계획 자체를 까먹어버리는 빈도도 조금은 줄어들고 있습니다. 아주 조금씩은 나아져가고 있는 것 같아요. 이렇게 노력을 계속하다보면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된 것만으로도 제게는 무척 뜻깊은 일입니다.
꽤 긴 시간들이었어요. 이제는 인식이 많이 바뀌길 바라고, 더는 저처럼 오랜 세월동안 혼자 고통스러워야만 했던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도 여기 에이앱이란 곳에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니, 저도 사회도 정말 많이 바뀌어온 것 같아서 기뻐요. 이제는 열심히 노력하고 걸어갈 일만 남은 것 같아요. 모두 화이팅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