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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또 술을 마시면 개다, 진짜.
Level 3   조회수 96
2019-06-28 00:53:13
"내가 또 술을 마시면 개다, 진짜."

꽤 많은 사람이 숙취에 찌들어 얘기하고, 얘기한 걸 기억하면서도 또 술을 마신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개가 되는데, 한동안 나는 주위 사람들에게 '주기적으로 개가 되는' 대표적 인물이었다.

멍멍. 왈왈. 그르르르릉.

술을 왜 마시는지 어릴 땐 알지 못했다. 7살 때 사촌형이 게토레이라고 속이고 준 이름 모를 칵테일은 맛대가리가 전혀 없었고 중2때 친구 어머니 사무실에서 우연찮게 맛본 소주는 가루약보다 맛없는 몇 안 되는 음식물 중 하나였다. 엄마랑 치킨 먹을 때 한 모금 맛본 맥주는 그나마 괜찮긴 했는데, 그렇다 한들 사이다보다 맛있는 건 아니었다.

근데 술을 마시며 생기는 피해는, 어린 내 시선으로는 엄청났다. 살인이나 강간 같은 강력범죄의 가해자는 항상 자기 죄를 "술 마시고 한 실수"라고 얘기했고, 할아버지는 술 드실 때마다 슬퍼보였다. 꽤 많은 드라마 속 연인들이 술을 마시고 로멘틱한 키스를 했지만, 그 중 반 정도는 '술김에 생긴 아이로 인한 고통'에 시달렸다. 예능 프로그램에는 연예인들이 가끔씩 술 때문에 생긴 우스꽝스러운 일을 얘기했고. 그래서 한때는 다짐했었다. "나는 어른이 되어도 꼭 필요한 상황이 아니면, 절대 술을 마시지 않을 거야."

멍멍. 왈왈. 그르르르릉.

스무 살엔 성실히 취했다. 술을 마실 이유가 많을 때였다. 기뻐서 마시고 슬퍼서 마시고, 날이 좋아서 마시고 날이 우중충해서 마시고, 애인과 싸워서 마시고 애인과 화해해서 마시고. 어쩌면 인과관계가 뒤바뀐 것일지도 모른다. 술을 마셔서 애인과 싸웠고 술을 마셔서 애인과 화해한 것일 수도 있다. 근데 어떤 이유로 술을 마셨든, 깨질 것 같은 머리와 코끝에 찌든 술냄새를 맡으며 일어나는 다음 날 낮 - 절대 아침이 아니다 - 에는 항상 후회와 함께 다짐했다. 내가 다시 술을 마시면, 진짜 개다.

멍멍. 왈왈. 그르르르릉.

작년부터 술을 줄이기 시작했다. 건강상의 문제가 가장 컸지만, 세상엔 술을 마시는 것만큼 재밌는 일이 많다는 걸 알게 된 이후론 자연스레 술에 손이 안 간 것도 분명 있었다. 좋아하는 노래를 크게 틀고 드라이브하는 것, 멋진 경치를 보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 재밌는 영화를 보는 것, 하고팠던 일을 하는 것, 술 대신 커피를 놓고 누군가와 얘기하는 것, 모두 내겐 행복이었다. 사실, 행복하기 위해 나간 술자리가 스트레스가 되는 경우에 질리기도 했었고.

물론, 그러면서도 간간히 아침에 후회하곤 했다. "내가 다시 이렇게 술을 마시면 진짜 개다."

멍멍. 왈왈. 그르르르릉.

어제 술을 마셨다. 마음 맞는 사람과 갖는 술자리는, 그곳에 있는 사람이 마음 맞는 사람이라서 행복하고 그 자리가 술자리라서 행복하다. 행복해서 평소보다 더 마신 건지 아니면 그냥 오랜만이라 마구 마신 건지, 아무튼 나는 꽤 많이 마셨고, 오늘 아침엔 또 후회했다. '내가 또 이렇게 술을 마시면 개다, 개.'

근데 아마 이번 주말에 또 술을 마시게 될 것 같다. 그것도 많이.

미리 외쳐야지.

멍멍. 왈왈. 그르르르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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