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방으로 피난 파이 조회수 32 2019-03-27 06:46:40 |
#1.울고 싶다
저번에 글 쓰고 나서 한동안 글 쓸 일이 없을 것 같았는데 이렇게 빨리 다음 글을 쓰게 될 줄은 몰랐다.
글을 쓰려고 에이앱에 접속하는 순간 손목에 달린 시계가 나에게 일어나라며 울음을 토해낸다.
하지만 정작 울음을 토해내고 싶은 것은 나다. 잠도 못 잤는데 일어나라니...울고 싶다..
#2.피난
피난은 피할 피에 어려울 난을 쓴다. 어려움을 피한다는 뜻이다. 표준국어사전에 재난을 피해 멀리 옮겨 간다로 등재되어 있다.
그렇다. 나는 재난을 피해서 피방으로 옮겨왔다. 바퀴벌레라는 재난을.
남들이 보기에는 별 것 아닌 일로 호들갑 떠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나에게 자연재해에 부딪힌 것처럼 크게 다가왔다.
#3.바퀴벌레의 공습
바퀴벌레의 침입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계단에서 침투해오는 모습을 본것이 1회였고, 내 방으로 침입하다가 발각되어 침입미수에 그친 것이 2회였으며 침입에 성공해 습격해온 것은 이번이 5번째였다. 그리고 그 5번의 공습중 3번은 그제 저녁과 어제 아침 그리고 오늘 새벽이었다.
바퀴의 공습으로 인한 충격이 채 가시지도 않아 또 연달아 새벽에 기습해왔으니 어찌 호들갑 떨지 않을 수 있을까.
게다가 그 크기는 공습 횟수가 늘어날 수록 더 커졌다...
#4.사각사각
요즘 나는 11시나 12시에 자서 4시에 일어나고 있다.
낮잠으로 인해 사라진 시간을 매우기 위해서 혹은 잠을 줄여서 공부하기 위해서 일찍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원래대로라면 제 시간에 잤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제 저녁과 어제 아침 연달아 바퀴에게 습격당했기 때문에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조금만 이상한 소리가 들려도 바퀴가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신경쓰여서 도무지 잠이 오질 않았다.
그렇게 한참동안 억지로 버텨내다가 마침내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이제는 바퀴든 뭐든 상관 없을 것 처럼 느껴졌다.
알람들을 전부 끄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잠을 청했다. 그렇게 잠을 자려는데 어디선가 사각사각 소리가 났다. 매우 익숙한 소리였다.
사실 그 소리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이따끔씩 그 소리가 들려오곤 했는데 처음에는 그 소리의 정체가 바퀴인줄 알고 불을 켜 이곳 저곳을 수색했었다. 그러나 매번 소리의 정체를 찾을 수 없었고 결국 그것을 천장에서 움직이는 쥐의 발자국 소리 혹은 비닐 쪼그라드는 소리 혹은 환청 소리로 취급했었다.
오늘도 그 소리가 들리길래 또 환청이 들리는구나 하면서 자려고 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그 소리가 사각사각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도 벽을 타고 아래로 내려오는 것 같았다. 불길한 생각이 들자 재빨리 핸드폰 후레쉬로 소리가 난 곳을 비췄다.
나는 커다란 비명소리를 와 함께 그것의 정체를 마주했다. 그곳에는 중지 2마디 정도의 크기로 보이는 대왕 바퀴벌레가 있었다.
그 거대한 녀석은 마치 함흥차사가 된 부하들을 알아보기 위해 직접 시찰하러 온 바퀴부대 사령관 같았다.
그 녀석은 움직일 때마다 사각사각 기분 나쁜 소리를 냈다. 게다가 벽틈에 몰아 세워 둔 택배박스를 타다다닥 지나니 소리가 배가 됐다.
#5.모굴리 소년
뇌정지에 빠져있던 나는 정신을 차리고 그 녀석을 잡기로 결심했다. 조심스럽게 불을 켰고 침대를 세웠다.
모든 준비를 마쳤고 그 녀석을 잡기위해 움직이려고 하는 순간 그 녀석은 살기를 느꼈는지 재빨리 시야에서 사라졌다.
침대 바닥 밑으로 갔는지 옷장 뒤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녀석이 움직일 때마다 소리 나던 택배 박스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옷장과 천장 사이 틈에 4개, 옷장 뒤 사이 틈에 2개가 있었는데 오랜 시간 동안 방치한 탓에 곰팡이에게 침식되어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벽 틈에 있는 박스들을 꺼냈다. 그것들은 아직 침식되기 전이었다. 안도의 숨을 내쉬며 옷장과 천장 사이 틈의 박스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공간이 없어서 빼곡하게 쳐박아뒀기에 쉽게 빠지지 않았다. 몇분간 실랑이를 한 끝에 마침내 박스를 꺼냈다.
생각보다 상태들이 괜찮았지만 천장과 가까이 붙어 있던 박스는 그렇지 않았다.
그 녀석은 이미 택배 박스가 아니었다. 곰팡이 그 자체였다. 내가 곰팡이인지 택배 박스인지 구분을 못하는 곰아일체의 경지에 올라있는 듯 했다.
그 녀석은 곰팡이계의 모굴리 소년이었다. 그 녀석은 자신이 곰팡이임을 주장하며 엄청나게 역한 곰팡이 냄새와 습기를 뿜어냈다.
살면서 그토록 지독한 곰팡이 냄새와 습기는 처음 느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 녀석이 바퀴부대를 키워 낸 장본인이라고.
#5.그리고 드는 생각
이번 일로 인해 드는 생각은..
첫째, 이런 에피소드를 겪었을 때 이렇게 글이 아닌 말로 재밌게 조리있게 풀어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둘째, 누군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없어서 그러니까 정서적 교감을 나누고 공감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쓰고 연인이라고 쓴다)이 없어서 참 외롭다.
셋쨰, 그래도 이렇게 에이앱에 글 쓸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둘째, 1년이나 살았으면서 사각사각 소리의 정체를 이제서야 알게 되다니 이것을 불행이라고 해야할지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모르겠다. 물이 필요하다. 원효대사의 해골물이. (원효~해골물 겟또다제!)
셋째, 밖에서 잘 생각으로 이것저것 챙겨왔지만 막상 빼먹은게 많았다. (이것 또한 ADHD의 위엄이겠지요.) 정말 재난이 닥친다면..? 잘 준비해야겠다는 생각..
넷째, 역시 집이 최고다...잠깐이지만 그냥 다 때려치고 집으로 내려가서 공부해야하나 생각도 했다.
다섯째, 그래도 서울에 친구들도 있고 동생들도 있어서 다행이다. 사고무탁은 아니라서.
여섯째, 이사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로.
이것말고도 더 많은 생각이 났던 것 같은데 글 쓰다 보니까 그리고 졸리다 보니까 잊어버렸다.
뭔가 중요한 것을 잊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지만 마무리해야겠다. 쓸데없이 긴 글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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