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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참 좋아졌다
Level 8   조회수 1258
2019-09-10 00:09:34

  

      부루마블이라는 보드게임에서 무인도에 갖혀 몇 판 패스하며 한 숨 돌리는 것 같은 것과 흡사한 생활을 일년 조금 넘게 했습니다. 부루마블을 해본 분들은 아실겁니다. 때론 무인도도 나쁘지 않습니다. 호텔은 아니여도 빌딩, 아니면 별장이라도 한 두채 가지고 있고, 특히 주변에 남들 빌딩이 세워진 서울, 뉴욕 등등이 즐비할 때, 요럴때 한 판쯤 쉬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지요. 물론 현실은 조금 다릅니다. 별장은 뉘집 댕댕이 성함인지 감도 안 잡히고요. 버지니아 울프가 부르짖던 소설을 쓰기 위해 가져야 할 최소한의 조건인 나만의 공간과 충분한 수입조차 없습니다. 제 꿈이 소설가가 아닌건 다행이지만 소설가가 아니라도 이것들이 절실한건 유감이군요.


얼마전에 얼떨결에 새로 출시된 갤럭시 노트 10으로 핸드폰을 바꿨습니다. 최신폰을 쓴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최신폰이 아니라 "근래폰" 조차 근처에도 가본 적 없었던 저에게(그 전까지 쓰던 핸드폰: 현재는 팔지도 않는 아이폰 5, 소니 엑스페리아) 이번 개통은 저로 하여금 와, 세상 좋아졌다, 소리가 절로 나오게 합디다. 핸드폰 오른쪽 엉덩이를 누르면 삥뽕하고 전자펜이 나오고요. 그걸로 사진도 찍고 그림도 그리고요. 화면 한번 쓰다듬으면 화면이 캡쳐되고요. 카메라 화질이 몇년 전까지 쓰던 디카보다 열 배는 좋고요. 화면 문지르고 손가락만 갖다대면 버스도 타고 결제도 됩디다. (갤럭시 홍보 아니고요. 삼성카드 바보멍청이똥깨. 할부만 끝나면 현대카드로 갈아탄다. 반드시.) 


큼큼. 아무튼 놀라운 세상입니다. 


근래들어 무인도가 약간 비좁고 갑갑하게 느껴졌습니다. "자기만의 방"과 적당한 월 수입도 갖고 싶어졌습니다. (사는 집에 제 방은 없는 것은 아니고요. 독립된 저만의 공간을 뜻합니다.) "생각없이" 살아보려 한지 어언 1년. 다시금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톱니가 듬성듬성 빠진 톱니바퀴인 채로, 나름 사회에서 굴러가는 법을 찾느라 고심입니다. 


그러다 뜻밖에도 이런 생각이 났습니다. 제가 쇼핑의 쾌락 속에 느낀 "좋아진 세상"이라는 것이 철저히 구매자, 이용자, 고객, 손님 입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이라는 걸요. 아마 삼성전자에서는 저렴한 가격과 수많은 혜택 그리고 최첨단의 기술을 제공하기 위해 그 많은 노동자들이 수십 가지의 업무로 매일 생존이 걸린 저글링을 할 것이고요. 제가 오늘 새벽 1시에 클릭 하나로 구매한 물건을 당일 배송하기위해 그 소셜커머스 업체 직원과 택배기사는 터무니없는 노동 강도를 버텨냈을 것이고요. 


이런 생각이 든 순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편의를 당연하게 누리는 이 도시에서, 저처럼 "적당한 노동과 적당한 수입" 을 바랄 수 있는 건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제가 잡코리아에서 넘겨보는 형편없는 연봉과 높은 노동강도의 수많은 직무들로 이 도시가 굴러가는 것 같았습니다. 수년간의 경험으로, 아무리 낭만적이고 아무리 만만해보이는 일도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도 알았고요. 


생각하다보니 세상이 좋아진 건지 어쩐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조물주 위에 건물주" 라는 흔한 표현이, 노동을 하고 댓가를 받는, 당연하다고 배워온 경제 원칙을 벗어난 사람만이 행복할 수 있다는 것처럼 들립니다. 꿈과 장래희망은 다른 것이고, 장래희망과 직업은 다른 것이며, 직업과 생계는 또 다른 것이라는 것처럼 들립니다.  


...휴. 쓰다보니 오늘은 제가 정말 싫어하는 마실 것 없이 먹는 구운 밤고구마만큼이나 목 막히는 내용입니다 ?


잠시 영국 유학 시절을 떠올려 봤습니다. 런던의 버스는 멀쩡히 운행하다가도 도중에 목적지가 바뀌는 일이 드물지 않고, 그렇게 되면 아직 도착지에 못 왔어도 군말없이 내려야 합니다. 그때 참 욕을 많이도 했습니다. 손님이 왕인건 바라지도 않는다. 참내. 이건 뭐 자기들이 왕이고만. 


그때 가볍게 내뱉은 이 말의 어폐를 이제야 느낍니다. 손님은 왕이여야 하지 않으며, 그렇게 왕 대접 받은 손님은 자신의 일터로 돌아가 다른 누군가의 노예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요. 저를 매정히 내려보낸 런던 버스 기사들은 그날 "서비스 정신" 이라는 이름의 과중한 업무를 짊어질 필요가 없었겠지요. 아마 구직자로써의 우리가 바라는 만큼의 여유와 인간적 존엄성을 얻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기브앤테이크. 우리가 내놓아야 하는 것에 한탄하는 만큼, 다른 사회 구성원들로부터 받는 것도 생각해보려 합니다. 


긴 글 읽느라 수고하셨습니다 ?


바라건대 저를 비롯한 구직자들에게 조금 더 인간적인 취업 시장이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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