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국 나이로 서른여덟 살에 ADHD(한영 전환 불편하니까 이하 "@"라고만 씀) 진단을 받았다. @가 나와 관련이 있는 질병일 수도 있다고 생전 처음으로 생각해본지도 불과 두어달 지난 때였다. 검사를 하고 약을 받아 집으로 와서, 내내 @에 대해 검색했다. 놀랍게도 내가 겪는 문제들이 하나하나 설명되는 기분이었다. 처음 의심이 들었던 부분인 주의력부족만 문제인 것도 아니었다. 이얘긴 여기서 이걸 읽는 분들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을 내용으로 대동소이할테니 이정도로 넘어가자.
이 소식을 가장 먼저 전한 사람은 서로의 관대함에 기대어 오만 얘길 다하는 친구였다. 각자 마음의 어둠을 털어놓고 정신과를 가봐야 한다 상담을 받아봐야 한다 좋은데 아느냐 이런 얘기들을 하곤 하던. 메신저로 병명을 말하자 그 친구의 가장 첫 반응은 "너 혹시 어디서 인터넷 자가진단 테스트 해보고 그러는거 아니냐", "전문가가 진단한거 맞냐" 였다. 내가 한 상담과 검사와 진단의 과정을 간략히 읊어주자 대단히 놀라워하며, 약의 힘으로 새 삶을 살라며 응원해주었다.
그 다음으로 소식을 전한 사람은 퇴근한 배우자였다. 특별한 반응은 없었다. 원래 좀 무덤덤한 사람이긴 하다. 나중에 얘기하는데 내가 그렇담 본인도 그런 성향이 좀 있지 않을까, 요즘은 집중력이 좀 떨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하더라. 내가 보기엔 그건 걍 스트레스 같다.
나는 트위터를 하는데(트위터 정말...@ 친화적인 매체이다...), 트위터에 전에 @를 의심한다는 트윗을 썼던 것을 끌어올려 조금 돌려 언급했다. 한 트친이 그 소식을 듣고 본인의 @를 의심하기 시작했고, 내 소개로 내가 진단받은 병원에 가 봤다가 정말로 진단을 받았다. 다른 여러가지 이유로 투약은 안 하기로 했다고 한다.
다음날 오래된 절친 4명이 모인 단톡방에 소식을 전했다. 그중 1명이 "네가 그렇다면 나도 의심된다"고 말했다. 1년 정도 내가 열심히 챙긴 적이 있는 친구라 그렇게 생각할만도 하지만 아마 걔는 @가 아닐거다. 3명의 친구들이 다들 내가 힘들었겠다며, 친구인데도 미처 몰라보아 미안하다며 다정하게 위로해주었다. 그리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며, 내 머리가 좋은게 분명하다고 칭찬해주었다.
주말, 건강관리차 정기적으로 다니고 있는 병원 주치의 선생님에게 소식을 전했다. 약을 먹게 되었기 때문에 말할 필요가 있었던 것인데,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며 크게 놀라셨다. 약의 용량이 걱정된다고 털어놓았는데, 투약에 관한 사항은 정신과 선생님이 가장 잘 알 것이지만 나를 지금까지 봐 왔고 잘 알고 있으니 앞으로도 지켜보면서 뭔가 문제가 있다고 느껴지면 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다음주, 오랜만에 만난 친구(정신병력 있음)에게 소식을 전했다. 사람은 겉으로만 봐선 알기 어렵다며 크게 놀랐다. 가족중에 @ 환자가 있다며, 내가 @라면 자신도 @일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왠지 묘하게 "정병러"의 동지감 같은게 느껴졌다.
오래된 친구에게 전화로 소식을 전했다. 몹시 놀라워하길래 다들 그렇게 놀라고 신기해한다며, 이 소식을 들은 10명 이내의 사람 중 5명이 자신을 의심했는데 6명째 사람이 되겠냐고 물었더니 웃더라. 여기저기 아픈 데가 많은 사람인데, 긴 투약의 부작용에 대해 겁을 주었다. 오랜만에 만나기로 하고 약속을 잡았다.
@는 유전이 많다던데 부모님 중에 고르자면 아빠일것 같다. 특별히 문제를 일으키는 타입은 아니었는데 한가지 일을 오래 하질 못하셨다. 그래도 유쾌한 분이라 넉넉하지 않아도 즐거운 어린시절을 만들어주셨다. 물론 그 과정에선 책임감 강한 엄마의 희생이 컸지. 부모님께는 말하지 않을 생각이다. 이미 독립한지 10년이나 됐고 결혼을 한지도 5년이 넘어 내 병의 관리나 치료에 부모님의 협조가 필요없기도 하고, 분명 엄마가 자책하고 혼자 고민하며 수많은 민간요법을 안겨줄 것이다. 아빠는 그냥 딱히 믿지 않고 노오력이 부족하다고 할 것 같고, 이미 60대인데 치료를 고려할 필요가...그건 아빠가 스스로 정해야 하는 문제긴 하지만, 아무튼. 어느날 말실수로 흘러나오지 않는 한(물론 우리는 그런 일이 많이 있지), 부모님은 그냥 영영 모르실 것이다.
나는 자녀를 가지지 않을 계획이지만, 동생은 결혼해 아이가 하나 있다. 내 무자녀 계획을 포함해 여러 비밀을 공유하고 있는 동생에게, 이 소식을 전할까 말까 고민해봤는데, 더 많은 비밀을 얹어주고 싶지 않아 일단 접어두기로 했다. 하지만 유독 예민하고 불안이 많은지 만날때마다 필사적으로 우는 어린 조카가 나중에 더 자라서도 뭔가 문제가 있는것이 아닌지 의심되면, 그때는 조용히 말해볼 생각이다. 사실 나는 병이 있었고, 유전의 영향이 크다고 하니, 혹시 모르니 검사를 받아 보라고.
나는 학생때 성적이 좋았고, 경쟁률 높은 시험을 여러번 통과했다. 지금까지 내가 성취한 것은 모두 @에 대한 아무런 자각 없이 내가 게으르고 멍청하다고 생각하며 한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주변에 알리는 데 더 자신이 있었던 것 같다. 내가 @를 앓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말해도 적어도 나를 오래 안 사람들이라면 나의 자질이나 능력을 의심하거나 나를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을거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실제로는 별생각없이 충동적으로 소문내버린거긴 했지만(..), 아무튼 나도 인식 못한 내심은 그런거였지 않을까.
일적으로 알게 된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굳이 할 생각은 없다. 머리 좋은 이미지가 도움이 되는 직업이라 그냥 머리 좋은 척 다 알고 파악이 된 척 하고 살았는데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다. 머리 좋고 일은 잘 하는데 인간관계에 조금 서툰, 좀 특이한 사람으로.
사실 이 얘길 전할만한 가까운 친구 몇 명이 더 떠오르기는 했는데, 그건 머릿속으로 생각만 하다가 걍 접었다. 그냥...앞으로 친구들의 아이들이 혹시 뭔가 문제가 있어 고민하는걸 알게 된다면 그때는 조용히 다가가 얘기해주려고 한다. 사실 나도 @가 있다고, 그래도 이렇게 잘 살고 있다고, 괜찮다고. 어차피 환자라면 병식이 있고 치료를 받는 환자인 편이 낫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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