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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와 병자 사이
Level 3   조회수 130
2019-11-05 20:10:55


남자친구와 헤어졌습니다.


고작 2주쯤 지난 일인데도 아득하게 느껴지네요.

혼자 지내다 보니 둘이 있었을 때 보다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 처럼 느껴지나 봅니다.


이별하는 커플들이 으레 그렇듯이, 반복되는 다툼에 지쳐서 시간을 갖자고 했고, 혼자 여러 방면으로 머리를 굴려보다가 마지막으로 도움을 요청한 게 정신과 선생님이었습니다.


전 남자친구와 저는 각자 다른 정신질환을 가지고 있었고, 그 때문에 일반적인 커플들과는 사뭇 다른 갈등을 겪곤 했었으니까요.


내가 상대에게 상처를 주거나 상대가 나에게 상처를 입힐 때, 그것이 '병으로 인한 것인지' - 즉, 치료를 통해 고칠 수 있으며 애인으로서 이해하고 보듬어 줘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상대에 대한 무신경함에서 나온 행동인지 누군가가 명확하게 판단해주길 바랐던 것 같아요.


하지만 아무리 전문의라 해도 그렇지 제 말 몇 마디 듣고서 그런 게 가능할 리 있겠습니까. 그냥 헤어지라고 하시더라고요.


원래 힘들 때 가까워 진 사람일 수록 강렬한 감정을 느끼는 거라고, 그럴 때일 수록 가볍게 만난다는 마음가짐으로 여러 사람을 만나봐야 한다고 하셨는데, 그건 제 경우만 봐도 맞는 얘기인 것 같습니다. 


주위에 정신질환이 있다는 걸 털어놓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부재한 상황에서 비슷한 처지인 전 남자친구와 가까워졌고, 어쩌면 이성으로서 사랑하는 마음보다 정신적으로 의존하려는 마음이 더 컸을 지도 몰라요.


그리고 본인도 아픈 상태면서 다른 사람 무리해서 품으려 하지 말라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물론 에이앱처럼 비슷한 고통을 겪어 온 사람들이 서로의 아픔을 공유하면서 치유받는 경우도 있지만, 자칫하다간 자신이 가진 병으로 상대까지 괴롭게 만들면서 서로 악화만 될 수도 있으니까요.


어디까지가 전문의로서 낸 의견이고 어디까지가 자기 주관대로 해준 조언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정신질환 뿐 아니라 크고 작은 상처를 가진 모든 사람들한테 대체로 들어 맞는 얘기인 것 같아 관계를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됐습니다.


그리고 맛이 가버린 뇌신경 탓에 희석된 진심이 무엇이었는지는 그 사람이나 저나 치료를 받으면서 차차 알게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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