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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퉁이를 돌아도 새로운 나로 변신하지 않아
Level 8   조회수 172
2020-02-05 21:12:58

ADHD를 발견하기 전, 꽤 오래 상담을 받았다. 

당시엔 내가 에이디일 줄은 생각도 못 했지만, 일상생활이 가능하긴 한데 무기력과 자존감 부족과 좀 우울증도 있는것같고...에이 길게 설명할 것도 없고 여기서 이거 읽는 분들은 뭔지 대충 다 알잖아요? 그러던 와중에 어쩌다 해보게 된 TCI검사에서 불안은 미친듯이 높고 자존감은 바닥을 쳐서, 정신과 아닌 의사선생님이 권해주셔서 시작한 것이었다. 

그때 비록 에이디는 발견하지 못했지만, 분명한 소득을 얻고 상담을 중단했었다. 


나는 완벽할 필요가 없다, 좀 못 할 수도 있다는 것. 


글을 이렇게 시작하면 엄청 완벽주의자였을 것 같은데 그렇지도 않았다. 자신이 허술함을 잘 알고 있었고, 지금과 완전히 똑같은 수선스러운 태도로 그 허술함을 떠들고 다녔다. 그러나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아무튼 나는 특별하고 잘났으니까 잘 해야 하고 더 잘 해야 하고 못 하면 안되고 유능해야 하고 똑똑해야 하고 똑똑한게 티가 나야 하고, 그런 생각들을 안고 살았을 뿐이다. 그런 마음이, 지금도 완전히 사라졌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고 그것은 사실이 아니거나 적어도 매우 과장되어 있고, 그러니까 그런 생각에 파묻혀서 자책하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내가 상담을 통해 얻은 큰 소득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그것이 이 글의 제목이 되었는데, 나는 나일 뿐이고 뭔가 어떤 성취를 이루거나 어떤 계기가 있거나 뭔가 변화를 겪는다고 해서 새로운 나로 갑자기 변신하지 않는다는 것. ㅇㅇㅇ만 하면, ㅁㅁㅁ를 하면 ㅎㅎㅎ가 되면 ㄹㄹㄹ를 얻으면 갑자기 내 인생이 달라지고 내 문제가 전부 해결될 것 같은 느낌적 느낌이 들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그런 놀라운 일이 일어나봤자 나는 여전히 나이고 나의 문제가 일거에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이미 여러차례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인정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드디어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내가 가진 몇가지의 큰 문제들 중 일부에 대해서만 해답을 얻은 상태로 상담을 종료하고 걍 살다가 다시 정신과를 찾았다가 이번엔 에이디 진단을 받았다. 그리고 콘서타를 먹기 시작했다. 내가 가진 여러 문제들의 근원을 알아내고 그것을 개선할 수 있는 약물을 손에 쥐었으니, 어쩌면 나의 여러 문제들은 비교적 쉽게 해결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깜찍한 꿈을 한번 더 가져 보았지만... 


여전히 나는 나였다. 


많은 변화가 있었던 건 사실이다. 치료를 시작하지 않았다면 이직은 꿈도 못 꿨을 것이고, 훨씬 더 빠릿하게 외출준비를 하고 전보다 훨씬 덜 미루고 훨씬 더 집중해서 생산성있게 일을 하고 있는데다, 놀랍게도 가구와 문틀에 부딪히는 일과 머릿속 랜덤 배경음악이 훨씬 줄었고 부모님에게도 더 살갑게 굴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저녁엔 빈둥대고 설거지와 청소를(전보단 훨씬 덜하지만) 미루고 아침엔 시간에 쫓기고 눈치가 좀 부족하다. 


에이앱에서 비슷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면서, 내가 지금까지 나의 개성이거나 혹은 나만 가진 큰 문제라고 여겼던 것이 그냥 에이디의 한 유형 중 하나의 특성일 뿐인 것인가 나의 개성은 어디로...?라는 의혹을 느끼는 일도 종종 있지만, 원래 사람은 대충 비슷비슷한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보통보다 조금 더 많이 특이한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뿐ㅋㅋ


이번에도, 에이디 진단이라는 새로운 갈림길을 만나 모퉁이를 돌았어도 새로운 나로 변신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새로운 풍경을 만나고 새로운 아이템을 먹었다. 경험치도 조금은 쌓였겠지. 



덧. 신년회 후기를 쓸 수도 있었지만, 남들 다 하는건 아무리 좋아 보여도 괜히 안 하고 싶은 심술로 후기를 제꼈다 ㅋㅋ 그러나 즐거웠습니다. 체력이 딸려서 더욱더 격렬하고 적극적으로 오래오래 놀지 못한 게 한스러울뿐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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