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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vel 8   조회수 553
2020-03-28 17:48:48



...선생님이 되었습니다. 


유치하게도, 참 멋대가리 없는 직업이라고 생각해왔기에 고려해본적이 없었었지만... 생계라는 하나의 뿌리에 적성, 가능성, 따위의 이름을 가진 수천만, 수억개의 가지를 가진 고민의 나무를 가만히 들여다보니, 지겨워져서 그 많은 가지를 다 치고 최우선적인 가지들만 남겨보았던 겁니다. 저로서는 몹시 드물게도, 몇 안 남은 가지들을, 즉 단단하고 담담한 현실을 마주하고 보니, 영어 강사라는 직업이 보이더랍니다.


그래서 영어를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제 평생의 주적이었던 대한민국의 입시교육, "영어"가 아닌 영어라는 이름의 "한국식 영어학" (Korean Englishology라고 해야될까요? ㅋㅋㅋ). 그것의 한복판으로 들어와서 일주일에 5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실 한복판까지는 아닌 것도 같습니다. 영어 입시교육이 서울특별시라면 은평구나 강서구 정도의 느낌일까요. 일단 그 막대한 자본과, 그만큼이나 막대한 열기(광기)에서 어느정도 거리를 두고 있으니까요. 


너무나도 감사하게도, 저처럼 단순하면서도 안 치열한 라이프 스타일을 가진 원장님을 만나 이것저것 자유로이 시도할 수도 있고요. 학군 자체도 학구열이 그다지 높지는 않고요. 그 덕에 내신과 입시를 위한 교재를 쓰면서도 제법 제 방식으로 풀어 영어를 가르칠 수 있습니다. 조금씩 작은 성공과 실패를 맛보며 나름 행복하게 일하고 있는 요즘의 홀랑입니다. 😀


멋있으면서 나다울 수 있는 직업을 거의 10년을 고민하면서 알아차려버린 것들은, 이렇게 멋있어 보였던 이것도, 저것도, 요것도 싸그리 멋대가리가 없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고 그때마다 패닉과 절망감에 휩싸였습니다. 멍청하게도 이걸 알아차린건 최근입니다ㅡ멋있는 직업이 없다는건, 다시 말해 그 어떤 직업도 멋있을 수 있다는 것 말이죠. 직업과 생계란 어떤 옷을 입고 있어도 결코 쿨하지 않으며,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쿨한 사람들만이 존재한다는걸 참 일찍도 깨달았습니다.  


공부를 미친듯이 시키고 싶은 인격과 (수업 준비를 위한)공부를 미친듯이 하기 싫은 인격이 서로를 민망해하는 나날들이 많지만... 그래도 짜증나는 정도이지 영혼에 상처를 남기는 끔찍한 경험따위의 근처에도 가지 않습니다. (그래도 문법 공부는 진짜 더럽게 승질납니다. 수연(가명)아, 쌤이 정말 미안해. 이런 드럽고 그지같은걸 시켜서. 민수(가명)아, 갓 영어를 접한 너에게 이런 드러운 것들을 집어넣는거 증말 미안하다. 아, 아냐... 이것들 드러워도 고비만 넘기면 나름 재밌고 유용하단다. 하 근데 진짜 문법책 피고있으니 왜 승질이 솟구치지?)


홀랑 속엔... 홀랑 너무도 많아... 홀랑... 쉴 곳 없네... 


이렇듯 영어덕후 선생과 철없는 학생의 인격을 오가는 홀랑이지만... 그래도 괜찮습니다. 살면서 거의 처음으로, 제가 서 있는 곳이 저에게 괜찮은 곳이라는 느낌을 받으니까요.


저같은 (6)등신 바보천치도 이 세상 어느 구석에 편히 자리할 수 있으니, 누구든, 정말로 그 누구든 그럴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대도시에 뚝 떨궈진 야생 두더지같은 제가 조그만 보금자리 하나 차지할 수 있다면 분명히 이걸 못하는 사람은 없을겁니다. 


난 해필리에버애프터다! 부럽지? 너네도 할수있을듯!< 따위의 글을 쓰려던건 아닌데... 


뭐 이러다 망하고 그럴겁니다. 그래도 요지는, 그전과 같지는 않을 자신이 생겼다구요!!


어 망하면 안되는데... 망하는건 취소입니다.


퉤퉤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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